[논평] 혐오에 굴복하면서 혐오를 규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거둘 때 – ‘성적 지향’ 삭제 위해 정보통신망법 발의 철회한 조인철 의원에 부쳐

 

혐오에 굴복하면서 혐오를 규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거둘 때
– ‘성적 지향’ 삭제 위해 정보통신망법 발의 철회한 조인철 의원에 부쳐

 

1. ‘차별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선언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지난 5일, 더불어민주당 조인철 의원 등 11명의 국회의원이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정보통신망법)을 발의한 지 일주일만에 빛의 속도로 법안을 철회했다. 해당 법안은 민주주의 기반을 훼손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온라인 상 ‘혐오표현’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은 공적 기구가 적절하게 심의·규율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발의됐다. 그런데 보수개신교 반대 민원이 시작되자마자 차별·폭력 금지사유 중 ‘성적 지향’을 빼고 재발의하겠다며 법안을 철회한 것이다. 헌법의 평등권을 거부하고 성소수자 시민의 권리를 부정하면서 민주주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모순을 납득할 방도란 없다. 민주주의의 토대인 다양성과 다원성을 노골적으로 배격하려는 의도 속에서 이루어진 법안 철회는 그 자체로 차별을 정당화·조장·강화하는 행태다.

 

2. 혐오에 굴복하면서 혐오를 규제·해소해나갈 방안은 없다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거나 폭력을 선동하는 혐오표현을 방지할 필요성은 이미 대다수 시민들이 절감하는 바다. 만연한 혐오에 대해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요구는 계속 커져 왔고,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관련 법제도를 마련하려는 노력 또한 최소 10여 년 이상 이어져왔다.
2013년 노웅래 의원 대표발의의「방송법」개정안, 안효대 의원의 「형법」개정안, 이종걸 의원의 「특정범죄가중법」개정안은 모두 혐오를 다각도로 규제하기 위한 시도였다. ‘혐오의 정치’가 뜨거운 사회문제로 가시화된 2010년대 중반 이후에도 발의는 계속 이어졌지만, 보수개신교에 굴복해 법안 철회가 반복된 것 또한 이 시기부터다. 2016년 증오범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분석을 통해 대책을 마련토록 하는 「증오범죄 통계법안」(이종걸 의원), 2018년 본격적인 혐오표현 규제에 대한 근거법이자 단일법으로 발의된 「혐오표현규재법안」(김부겸 의원), 차별·혐오 조장 정보를 ‘불법정보’로 규율하는 「정보통신망법」개정안(신용현 의원)은 모두 보수개신교의 반대로 인해 빠르게 철회됐다. 보수개신교계를 방문해 동성애를 보호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일부러 ‘성적 지향’을 빼고 발의했다며 변명하는 모습은 왜 이다지도 익숙한가. 혐오표현을 규제할 만큼 사회적 논의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발의를 철회하는 것이 어쩌다 기본값이 됐나. 사회통합을 위해 혐오 규제가 필요하다면서도 사회분열의 책임을 소수자에게 돌리며 사회적 합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를 직시해야 한다.

 

3. ‘차별’과 ‘차별금지 원칙’을 전제하지 않은 혐오 대응은 실현불가능하다

 

다수의 혐오표현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혐오표현 규제 방안을 모색·실현하기 위한 필수 전제는 바로 혐오표현이 ‘차별’의 한 양태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혐오표현은 단지 욕설, 유해하거나 기분 나쁜 말, 비도덕적인 언행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되는 사회적 소수자 집단 및 구성원에 대한 차별을 조장·확산한다는 것이 핵심요소다. 따라서 혐오표현 역시 차별에 해당하며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편적으로’ 보장한다는 원칙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를 효과적으로 규제·예방하기란 불가능하다. 방송통신심위원회가 2019년 발간한 『인터넷에서의 성차별적 혐오표현에 대한 심의방안 연구』는 바로 혐오 규제를 위한 법제도 및 정책이 갖춰야 할 필수 전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혐오표현이 불합리한 고정관념·편견·차별을 강화하는 사회적 해악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차별 규제’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성, 둘째는 방통법 상 행정규칙인 「정보통신 심의규정」에서 ‘차별’과 ‘혐오’ 규정을 명료화 할 필요성이다.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이러한 규정의 기본 근거로 작동할 수 있지만(차별금지법이 혐오표현 대응을 위한 필수과제로 꼽히는 이유다), 근거법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개별 제도들에서 정의 규정과 함께 ‘보편적 차별금지 원칙’을 담보하려는 다방면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성적 지향’을 삭제한 채로 다시 법안을 재발의하고 혐오표현을 규제하기 위한 입법을 이어가겠다는 조인철 의원의 의지가 왜 입법 효과를 담보하기 어려운 어불성설인지 되새기기를 바란다.

 

4. 우리는 강력히 요구한다

 

하나. 조인철 의원 등 11인의 발의 의원들은 금지되는 차별·폭력 사유 중 ‘성적 지향’을 삭제하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포괄적 금지사유를 명시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다시 발의하라. ‘성적 지향’을 삭제한 법안 재발의에 이름을 올리는 수치를 택하지 않길 바란다.
하나. 이재명 정부와 여당은 혐오표현 규율의 기본 근거가 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라. 그동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이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대표적인 공적 기관조차 차별과 혐오를 규정하는 법적 근거가 부재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판단 및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는 변명으로 일관해왔다. 유엔은 혐오표현 대응의 효과적인 실행을 위해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국가, 시민사회, 플랫폼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지난 겨울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며 광장을 채웠던 시민들의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바로 지금 그 책임과 의무의 실행을 요구한다.

 

2025년 6월 6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