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3)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 Ⅱ : 난다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세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Ⅱ

 

차별은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로 몰아넣고 가두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빼앗고 내 쫓습니다.
공장과 학교의 담벼락, 공공장소, 국경, 병원 문턱, 화단과 농사짓는 땅이 누군가에는 넘지못할 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

 


 

 

 

 

첫 번째 이야기손님 

늦잠 자는 시간을 사수하고 싶었던, 난다

 

 

 

“다들 1단원은 배웠지? 2단원부터 시작한다.”

 

학교도, 과목 별로 바뀌는 선생님도, 친구들도, 교실의 생김새도, 교복을 입는다는 것도. 모든 것이 새롭던 중학교 1학년을 떠올리면, 첫 번째 교과수업 시간에 이런 말을 하신 수학선생님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당시 나는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분당이라는 신세계로 전학 온 학생이었다. 자연스럽게 쓰던 내 말투는 반 아이들 모두의 놀림감이 되었고, 나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창피하고 주눅 든 마음으로 사투리 억양을 고쳤다. 안 그래도 낯선 공간에서, 전학생인 데다가, 말투 때문에 놀림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을 헤쳐 나갈, 이렇다 할 깡이 부족했던 나는 수학선생님의 그 첫 마디에도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 때 같은 반 친구들 대다수는 정말로 ‘다들 1단원은 배운’ 상태였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나 하나였을 것이다. 학원에 다닌다는 건 별로 생각해본 적 없어서 집에서 혼자 1단원을 공부했다. 그리고 1학기 중간고사 수학시험 점수를 받아본 후, 본격적으로 수학이라는 과목에 손을 놔버렸던가… 그랬다.

2007년, 고등학생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그 학교는 당시 많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그랬듯, 3월에 입학식을 하는 바로 그 날부터 강제야자를 시켰다. 그 날의 기억이 나에겐 꽤나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미학혁명(미친 학교를 혁명하라)”라는 학생인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날 이후 나의 삶은 아주 많이 달라졌다. 미학혁명에서 만난 이야기들은 그 동안 내가 나 혼자서만, 혹은 종종 학교 친구들과의 뒷담화로만, 꿍시렁거리던 바로 그 이야기들이었다. “두발자유”, “체벌금지”, “입시폐지” 같은 구호들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다양한 목소리로 외쳤던 그 장면은 그 때의 나에게 대단한 울림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꿍시렁거림”의 볼륨을 조금씩 높여갔다.

 

2008년에는 결국 학교 밖으로 나왔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휴대폰’이었다. 이 이야기는 꺼내자면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생략. 학교를 나온 것을 후회하진 않느냐, 라는 질문을 지금도 종종 받는데 ‘후회하기엔 이젠 좀 오래 지나버려서…’ 라고 반 농담 삼아 답하기도 한다. 그러다 최근 주변에 어느 활동가의 자녀분이 고등학교 자퇴를 고민하면서 상담을 요청받았는데, 오랜만에 그 때의 기억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자퇴를 고민하고, 자퇴를 선택했던 당시에는 일부러 더 “난 내 발로 나온 건데?” 라고 강하게 말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러나 지금 다시 그 때를 곱씹어보면, 선택이면서 선택하지 않음이었다. 비좁은 교실, 40명이 넘는 학생들, 친한 친구, 안 친한 애, 허구한날 치르는 시험 때문에 시험 보는 대열(한 줄)로 자리를 배치해서 짝꿍 같은 거에 더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 때. 일등부터 꼴등까지 대놓고 공개하진 않아도, 모두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던 서로의 성적, 끝이 보이지 않는 점수 경쟁. 변비에 걸릴 지경이 될 때까지, 의자에 종일 앉아있었지만 완전한 ‘내 자리’는 없었던 교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진짜 삶을 찾겠다고 학교를 나왔지만, 그건 결국 학교로부터 쫓겨남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학교 밖에서의 하루하루는 그 동안의 삶과는 많이 달랐다. ‘학교 안 다니는 애’라는 시선과 마주할 때는 조금 두려웠고, 시험기간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때는 그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해방감과 불안감이 섞인 묘한 기분이 한동안 나의 일상을 채웠다. 무엇보다 늦잠을 자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좋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침잠이 많아서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고역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무 이른 시간이다. 보통 12시 넘어서 잠자리에 드는데, 다음 날 ‘무단지각’하지 않는 등교를 위해서는 늦어도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으니까. 나의 고등학교 자퇴는 여전히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자발적’ 퇴교이면서도 동시에 쫓겨남이며, 수십 년(어쩌면 더한 세월)을 한결 같이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학교와 교육현실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면서도 동시에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 시작점이었노라고, 새삼스레 되짚어본다.

 

어쨌거나 그 이후, 2008년부터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것저것. 우리의 고민과 요구를 알리고 전달하면서, 우리 사회에 인권이 좀 더 단단하게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내가 인권을 만났던 것처럼. 그래서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처럼.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지금도 조금은 불안하다. 고등학교도 그만두고 대학교도 안 갔고, 정말 그냥 보면 나를 이 사회의 낙오자라고 부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시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사는 것을 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학교는 내 시간과 내 자리를, 박탈했지만 지금 나는 그 기억으로부터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청소년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금씩 만나고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학교와 세상으로부터 차별받고 외면당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곳곳에 흩어져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만 가다보면, 언젠가는, 지금은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좀 더 보편적이고 당연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을 만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인권의 가치를 품고 세상과 맞설 용기가 우리의 힘이 되어줄 거라고, 기대해본다.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세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Ⅱ

 

 

01

02

03

04

첫 번째 이야기손님

늦잠 자는 시간을

사수하고 싶었던

난다

두 번째 이야기손님

상품 말고 사람이 숨  

쉬는 서울역을 바라는

이동현

세 번째 이야기손님

차별을 말하기가

겁니 어려운

네 번째 이야기손님

쫓겨나는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자는

미류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2)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몽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차별은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로 몰아넣고 가두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빼앗고 내 쫓습니다.
공장과 학교의 담벼락, 공공장소, 국경, 병원 문턱, 화단과 농사짓는 땅이 누군가에는 넘지못할 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


 






 


 




네 번째 이야기손님 


기억되고 기록되는 공간을 열망하는,


 


 





‘등’의 자리를 넘어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이라는 제목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성소수자에게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이 가능한 공간은 어디쯤인지를 생각해본다. 10만여 명의 서명으로 주민발의된 학생인권조례안에서 ‘성적지향․성별정체성’, ‘임신․출산’과 같은 논쟁적 차별금지사유들이 삭제될 위기에 처하면서 시작하게 된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당시에 성소수자 학생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떤 차별을 겪고 있는지 ‘사례’가 필요하다는 내외부의 요구에 <성적소수자 학교 내 차별사례 모음집>을 발간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단순히 제가 뒷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때려서 병원까지 간 적도 있고요. 길 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기도 하고, 넘어진 저에게 침을 뱉기도 했죠. 사실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어요. 모두가 똑같은 시선으로 저를 바라봤으니까요. 결국 학교라는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요.”


 


위의 사례가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학교는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배우는 공간’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모든 인간’에서 성소수자를 삭제하려는 서울시의회의 기만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에 어떤 단어를 대신한다 하더라도 차별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현실에 대한 씁쓸함 때문이었다. “결국 학교라는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요”, “결국 집/가족이라는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요”, “결국 직장이라는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요”….


 


성소수자들이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은,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정박해 있다거나 다른 구조들과 매개되지 않는 배타적인 경험의 속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성애중심 사회의 차별과 편견 속에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성소수자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비가시화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단 두 가지 중에 무엇이 덜 힘들 것인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조건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열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소수자로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즉, 사회적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감각과 사회적 관계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문제는 자기 자신이 되기 너무나 어렵다는 것, 그 열망을 승인받을 수 있는 관계와 장소가 너무나 요원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성소수자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익숙하게 위치 지워진 자리는 ‘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2007년 법무부는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며 차별금지사유 중 성적지향을 비롯한 7개 조항을 삭제하며 “등”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성소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공적 공간에서만큼은 결코 그 존재에 이름 붙이지 않고자 하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차별받을 수도 있는’ 개인이자 집단의 예시로서 등장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등’ 안에 포함되기를 거부하는 순간, 남은 것은 완전히 익명성에 녹아들어 삭제되는 것뿐이거나.


 


그런데 법/제도 앞에서의 ‘인간’을 재구축, 재규범화 하려는 최근 1~2년 간의 군형법 및 차별금지법의 답답한 상황들을 바라보며, 2011년 말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활동 당시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오늘은 참 역사적인 날’이라는 말을 자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역사적인 ‘오늘’의 순간은 아마 모두에게 다르게 기억되어 있겠지만, 모두에게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던 계기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12월 14일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이슈를 가지고 최초로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이라는 공공기관 점거농성을 시작한 날이기 때문에, 12월 19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성적지향을 비롯한 차별사유들이 삭제되지 않고 수정안이 통과된 날이기 때문에, 한국의 법제도에서 최초로 ‘성별정체성’이 차별금지사유로 명시된 날이기 때문에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인권을 특별하게 만들어서 조례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가 않습니다. … 성소수자, 임신ㆍ출산에 관한 문제, 이런 아이들을 보호해 주어야 된다는 논리로 말씀을 하셨는데 언제 우리가 그런 아이들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까? – 한학수 의원


 


그러나 뭐를 말씀드리고 싶냐 하면, 성소수자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현실에. – 김형태 의원


 


하지만 나에게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이 역사적인 공간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포함과 배제의 권력을 지우려는 시도 앞에서,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아예 삭제하거나 ‘보편적 인권’과 ‘평등’, ‘모든 인간’ 혹은 ‘모든 학생’이라는 추상적 그늘 아래 비가시적이고 비언어화된 존재로 위치지려는 시도 대신에, 우리 자신을 “존재하는 몸으로/보여지는 몸으로”, “얼굴이 있는 존재”로서 드러내며 그 시도를 경합하는 공적인 논의의 장 안으로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제235회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 6차 회의록’ 그 기록이, 본회의에서 ‘성적지향’, ‘성소수자’를 주제로 논쟁하던 장면을 지켜보던 기억이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경합의 과정에 청소년/학생 인권과 성소수자 인권을 결합시켜 고민할 수 있었던 만남과 갈등이 없었다면, 자기 자신을 대변하면서도 ‘우리’를 만드는 과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같은 소수자로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 입장 속에 있는 소수자들로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과정에서 ‘등’의 자리가 아닌 공적 공간을 어떻게 확장해 나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픈 이유다.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01




02




03




04



첫 번째 이야기 손님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김이찬


두 번째 이야기 손님


외톨이 점심시간이


아픈


김명희


세 번째 이야기 손님


일상의 자리를


되찾고 싶은


고동민 


네 번째 이야기 손님


기억되고 기록되는


공간을 열망하는


 



 


 


※ 사진출처 : [비마이너]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 [보러가기]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2)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고동민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차별은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로 몰아넣고 가두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빼앗고 내 쫓습니다.
공장과 학교의 담벼락, 공공장소, 국경, 병원 문턱, 화단과 농사짓는 땅이 누군가에는 넘지못할 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


 






 


 




세 번째 이야기손님 


일상의 자리를 되찾고 싶은, 고동민


 


 


 



대한문은 그런 곳입니다

나는 해고자입니다. 그리고 나는 대한문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에게는 눈에 넣으면 아플만한 아이들 셋이 있습니다. 무섭지만 마음 따뜻한 옆지기도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가끔 전화가 옵니다. 아빠 언제쯤 와? 내 대답은 늘 궁색해집니다. 하지만 내가 이곳 대한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동료와 가족들 중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으로 24분이나 운명을 달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한문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기 시작한 이후부터 해고된 나의 동료들과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쌍용차 해고자입니다.


 


나와 나의 동료들에게 차별은 일상입니다. 이 곳 대한문에서 집회를 하는 것도, 앉아있는 것도, 누워있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경찰들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청와대 앞에 가는 것도, 정부청사 앞에 가는 것도, 중구청 앞에 가는 것도 일단 제지의 대상이 됩니다. 경찰들은 나와 나의 동료들에게 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들은 일반시민이 아니라고. 이렇게 모여 있는 건 불법이라고. 몇 조 몇 항에 의거해서 처벌 받을 거라고. 그리고는 연행합니다. 기소를 합니다. 벌금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구속합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에게 떨어진 벌금만 해도 1억 원이 넘습니다. 그리고 김정우지부장도 우리에게 빼앗아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9년 파업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자들에게 430억이 넘는 손배가압류 구상권이 청구되어 있습니다. 이해가 쉽도록 이야기해서 430억을 일당 5만원씩 노역을 살려면 860,000일을 살아야합니다. 100명이 235년씩 감옥에 갇혀야 합니다. 놀랍게도 이 소송은 지금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일반시민이 아니지 않느냐는 경찰의 말은 그래서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함께 살자고, 해고는 살인이라고, 살기위해서 싸웠던 것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다 정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쇠파이프를 들었고, 화염병도 던졌습니다. 흔히 말하는 불법폭력파업의 전형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폭력을 선택한 건 아닙니다. 경영상의 위기라는 이유만으로 3000명이나 해고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정규직 비정규직 가리지 않고 해고만 하지 않으면 임금과 복지 모두 양보할 수 있다고 호소했는데 거부당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자 절규했는데 용역깡패와 구사대와 경찰들이 폭력으로 우리를 몰아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폭력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값을 치뤘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해고자들과 노동자들과 시민 분들이 구치소와 감옥에 갔고 집행유예기간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불법폭력을 저지른 용역깡패와 구사대와 경찰 어느 누구도 기소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죗값을 치루고 난 뒤에도 차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해고자라는 이유로, 강성노조라는 이유로, 전과자라는 이유로, 쌍용차 해고자라는 낙인으로 우리는 취업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이력서를 100통 썼다는 동료들도 있습니다. 평택 주변에서 취업하기 어려우니까 여수로, 거제로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버티기 어렵습니다. 쌍용차 해고자인 걸 알아버린 순간 일을 그만 두라는 통보를 받기 때문입니다. 해고자들은 그래서 일용직이나 대리운전으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5년째 그냥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청문회 이후로 진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경영상의 위기라고 이야기한 것이 사실 회계조작에 의한 거짓이었고, 회계법인과 금융감독원, 산업은행이 공모한 사기극이었다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24명이나 죽고 3000명이 길거리로 내몰린 쌍용차 정리해고의 진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냥 요구만 한건 아닙니다. 김정우지부장이 목숨을 건 단식을 41일이나 했었고, 3명의 정규직 비정규직해고자들이 송전탑 고공 농성하며 171일 동안 호소했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을 비롯한 대선후보들, 여야 당대표, 국회의원 등 많은 정치인들이 약속했던 국정조사를 실시하라는 우리의 요구는 너무나도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국정조사 실시하라는 요구에 분향소를 철거하고, 해고자를 복직시키라는 요구에 김정우지부장을 구속시켰습니다. 이건 숨 쉬지 말라는 협박입니다. 벼랑 끝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이들의 손을 밟는 살인행위입니다. 지난 5년 동안 계속 이어진 죽음의 행렬을 간신히 막고 있는 상황에서 더 죽어버리라는 악다구니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대한문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무지막지한 국가권력에 맞서 싸워나갈 것입니다.


 


쌍용차해고자들을 함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해고자들처럼 차별받고 배제되었지만 맞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 차별과 배제에 분노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차별이 너의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자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대한문은 그런 곳입니다. 쌍용차해고자들만의 싸움이 아닌 저항하는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모를 멈출 수 없습니다. 위로와 응원도 멈출 수 없습니다. 다시 이곳 대한문을 추모의 공간 만남의 광장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나의 차별이 우리의 차별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저항의 구심점이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만나야합니다. 나의 차별만이 아닌, 너의 차별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차별에 맞서 배제된 이들이 더 만나고 만나서 산을 이루고, 바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들이, 성소수자들이, 철거민들이, 해고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쫓겨나고 배제된 자들이 함께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서로를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함께 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싸움을 만들기 위해 더 웃겠습니다. 더 질기게 싸우겠습니다.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01




02




03




04



첫 번째 이야기 손님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김이찬


두 번째 이야기 손님


외톨이 점심시간이


아픈


김명희


세 번째 이야기 손님


일상의 자리를


되찾고 싶은


고동민 


네 번째 이야기 손님


기억되고 기록되는


공간을 열망하는


 



 


 


※ 사진출처 : [비마이너]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 [보러가기]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2)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김명희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차별은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로 몰아넣고 가두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빼앗고 내 쫓습니다.
공장과 학교의 담벼락, 공공장소, 국경, 병원 문턱, 화단과 농사짓는 땅이 누군가에는 넘지못할 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


 






 


 




두 번째 이야기손님 


외톨이 점심시간이 아픈, 김명희


 


 


 



외톨이 점심시간의 기억은 그만의 것일까?


 


비영리, 독립 민간 연구소인 시민건강증진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김명희입니다. 저는 예방의학을 공부했고 주로 건강불평등,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은 분들 대부분 스스로 경험하신 삶의 이야기를 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조금 다른 주제로, 그것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후배의 이야기입니다.


 


후배는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친구였습니다. 학생 운동에 열심이었던, 소위 단순 무식한  공대 남자이자 여자 후배들에게는 나름 다정다감한 ‘총학 오빠’였습니다. 저로서는 같은 과 후배가 아닌지라 저희 과에서 학생 운동에 열심히던 후배들을 통해 그냥 이름만 아는 정도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공의로 일하던 시절, 농촌 지역에서 대규모 주민 조사를 해야 하는데 일손이 달려서 아르바이트를 모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친구가 다른 후배의 소개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몇 년 동안 이름만 알고 있다가, 저도 얼굴은 그 때 처음 보았습니다. 저도 그렇고 저희 주임교수도 약간 당황했습니다. 아니 이 건장한 청년이, 왜 멀쩡한 직장에 다니지 않고 여기에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온 거지? 그리고 함께 일을 한지 하루 만에 더 큰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 친구가 어찌나 눈치 빠르게 일을 잘 하고 싹싹한지, 도대체 왜 취직을 못한 건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나름 양식 있는 시민인지라, 실례가 될까봐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하루는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어릴 적에 편도선 수술하면서인 거 같아요. 수혈을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그 후에 B형 간염을 진단 받았어요. 활동성 간염이면 취직을 못해요. 그래서 e항원이 음성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아, 그랬구나… 그런데 이렇게 건장하고 멀쩡해 보이는데? 어차피 간염이란 게 사람들을 무차별로 감염시키는 것도 아닌데? 같이 밥 먹는다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옳는 것도 아닌데, 취직이랑 무슨 상관? 부끄럽게도, 저는 예방의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간염이 취업금지 사유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른 건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간염 때문에 겪어야 했을 생활의 고통과 상처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후배는 낄낄대면서 남 일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들어오기 전까지, 밥을 계속 혼자 먹었어요. 담임선생님들이 간염 옮는다고 애들한테 이야기해서”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야, 그런 박해를 받고도 삐뚤어지지 않은 게 대단하다’고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무식이 죄는 아니라지만, 근거 없는 행동, 배려 없는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 선생님들은 반 아이들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그런 일을 한 거였겠죠. 위로가 필요했던 아이, 이제 겨우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아이의 마음은 고려해줄 겨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그 아이가 마음이 건강한 어른이 되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씁쓸한 과거를 웃으며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000년에 전염병 예방법이 개정되면서 B형 간염 보균자에 대한 취업 제한은 금지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B형 간염 보균자가 약 380만 명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공무원이나 일반 기업의 채용신체검사에 여전히 간염검사가 포함되어 있고, 또 암묵적인 고용차별은 여전히 문제가 되지만 어쨌든 최소한 공식적인 제한 조치는 없어진 것입니다.



그 후 그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업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토목공학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자리였습니다. 취업 제한도 풀렸고, e항원이 사라지고 간기능 검사결과도 오히려 비보균자보다 좋게 나와서 별 문제없이 신체검사를 통과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만성 B형 간염은 간암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병원을 다니면서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 친구는 IT 업계 노동자들이 그렇듯 과로를 밥 먹듯이 했고, 가끔씩은 만나면 일 못하는 후배 직원 흉도 보고, 무능한 부장, 황당한 거래처 뒷담화도 빼놓지 않는 평범한 노동자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승진을 하고 나더니, 노동자 편이 아니라 관리자 편이 되어 가는 것 같다고 괴롭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 바쁜 와중에 사회운동 단체의 홈페이지를 보수해주기도 하고 컴퓨터들을 점검해주기도 했었습니다.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유별날 것 없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실 오늘 이런 이야기도 본인이 직접 와서 해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그가 학창시절 내내 경험했던 따돌림과 상처, 자신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것에서 오는 불안… 이런 것들을 더욱 생생하게 들려주고 고민을 나눌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저는 그의 간염 진단 시기나 취직 시점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최소한 본인한테 사실 확인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3년 전, 그 후배는 마침 결혼을 앞두고 간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열심히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병을 이겨내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젊은 나이만큼이나 암세포도 혈기왕성했던 것 같습니다. 작년 초 암의 전이가 발견된 즈음,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대로 인생을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아쉽지 않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내내 외톨이로 지냈던 10대, 법이 바뀌기를 피검사 결과가 좋아지기만을 무작정 기다리던 20대 후반 – 그가 살아온 짧은 생의 절반 이상이 불안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의 삶을 끝낸 것은 간염 바이러스였지만, 그가 살아 있던 동안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간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이었습니다.


 


우리 사회 도처에, 다양한 형태의 차별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그저 배려심이 조금 부족해서, 혹은 후배가 다녔던 학교의 선생님들처럼 잘못된 지식 때문에, 아니면 막연한 불안 때문에 다른 이의 삶을 단정하고 기회를 가로막고는 합니다. 훗날 잘못을 깨닫는다 한들 그 상처를 보듬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후배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닌 열망’들을 남겨두고 떠났지만, 그가 받았던 상처와 고통은 오늘 한국사회에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특히나 HIV 감염처럼 밑도 끝도 없이 ‘부도덕’의 오명을 동반하는 경우에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건강상태가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삶의 기회를 차단당하는 일들은 이제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질병 자체가 주는 고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01




02




03




04



첫 번째 이야기 손님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김이찬


두 번째 이야기 손님


외톨이 점심시간이


아픈


김명희


세 번째 이야기 손님


일상의 자리를


되찾고 싶은


고동민 


네 번째 이야기 손님


기억되고 기록되는


공간을 열망하는


 



 


 


※ 사진출처 : [비마이너]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 [보러가기]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2)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김이찬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차별은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로 몰아넣고 가두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빼앗고 내 쫓습니다.
공장과 학교의 담벼락, 공공장소, 국경, 병원 문턱, 화단과 농사짓는 땅이 누군가에는 넘지못할 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


 






 


 



첫 번째 이야기손님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김이찬


 


 


 


사진출처 : 비마이너


똥 쌀 권리


 


2012년 12월 25일, 성탄절. 갑자기(!) 주어진 휴일을 맞아 놀러 온 노동자들로 복작대는 지구인의 정류장에, 갓 스물을 넘긴 캄보디아 출신 여성노동자 C(가명)씨와 M(가명)씨가 자기 몸집만한 트렁크를 하나씩 끌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내가 “문제 있어요?” 라고 묻자, 먼저 와서 상담 중이거나 휴식중인 다른 남자노동자들을 둘러보더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한 시간 후, 다른 노동자들이 용무를 마치고 상담실을 빠져나가고, 마침내 상담실에 통역을 해야 하는, 입 무거운 남자노동자 한 사람이 남게 되자, 그들은 조심스럽게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몇 개의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여주며 자신들이 3시간 반 동안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짐을 싸서 이곳으로 ‘도망 온’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 사진들과 동영상은 ‘어둑한 풀밭’, ‘얼어버린 농로’, ‘비닐하우스 뒤편도랑’, ‘연단 화덕이 설치된 비좁은 취사공간’, 다라이와 거기에 걸친 물 끓이는 전기막대 장치‘ 등의 이미지들이 담겨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입을 오므려 조용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화장실이 없어요! ”
“뭐라고요? 그게 뭔 소리? 공중화장실도 없어요?”
“없어요. 화장실 없어요.”


C씨와 M씨는 야채비닐하우스 30여동에서 일을 했다. 얼추 5,000평이 넘는 시설야채 작업장이다. C씨와 M씨의 숙소는 그 크고 하얀 비닐하우스 촌 변두리에 가설된 ‘작고 검은 비닐하우스’ 이다. 의문이 들었다. ‘이런 규모의 작업장에 화장실이 없는 게 말이 되나?’


“지난 3월부터 벌써 9개월째 거기 살았잖아요. 그럼 그동안 어디서 용변을 본거예요?”
“숙소에서 200m 쯤 떨어진 버려진 들판에 여름엔 수풀이 우거졌어요. 거기는 사람들이 잘 안 보이니까 거기까지 가서 용변을 봤어요. 그런데 너무 멀어요. 그래서 조금 동네지리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비닐하우스 뒤편에 밭둑의 도랑을 따라서 용변을 보았어요.”
“그래도 두 사람이 9개월씩이나 화장실 없이 지냈다는 게 납득이 안 돼요. 매일 아침 5시부터 저녁 6시나 7시까지 일했는데……. 일터나 숙소 근처에 화장실이 없다면, 그럼 어디에서 용변을 봐요?”
“매일 같은 곳에 용변을 볼 수 없으니까, 배변할 수 있는 몇 군데를 정하고, 그 근처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며 용변을 봤어요. 처음엔 3일~5일 배변을 참기도 했어요.”
“참,내…창피했겠다…”
“선생님! 창피했지만 그건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너무 추워서 그렇게 못하겠어요. 한국 겨울 이렇게 추워요 ?”
“사장님한테 화장실 달라고 말 안했어요?”
“여러 번 했어요. ‘너무 추워요. 사장님 화장실 주세요’ 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사장님 말했어요. ‘ 한사람 200만 원 줘. 다른 데로 가게 해 줄게. 딴소리 할 거면 캄보디아에 보내 버릴 거야!’ 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너무 슬프고 너무 추워서 그냥 나왔어요.”


 


게다가 이 작업장엔 일한 후에 몸을 씻을 온수도 없고, 욕실도 없다. 샌드위치 판넬로 가설된 방을 데우는 유일한 난방장치인 연탄보일러는 시간을 맞추어 연탄을 갈아대지 않으면 꺼지기 일쑤이다. 더구나 이 노동자들은 그들이 살아온 20년간 ‘연탄’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겨울에 매일 12시간 가까이 일해도, 그나마 두 평도 안 되는 작은 침실마저 난방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어디에 가서 몸을 쉴 수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분노할 겨를이 없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의 체류권에 심각한 위험을 주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용허가제도 안에서 노동자들은 ‘작업장을 이탈’하면 안 된다. 많은 사용자들이 ‘이탈신고’라는 것을 하는데, 이에 대해 노동자들이 1개월 안에 당국에 근거를 가진 항변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미등록 노동자’(한국 법무부의 호칭으로는 ‘불법체류자’)가 된다. 관할 고용노동부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진정을 하고 전화를 걸어 구제방법을 물었다. 그 직원이 답한다.



“그래요? 참 안됐네요. …… 그런데, 지금 노동자들한테는 고용센터에 진정할 권리가 없고, 사장님이 ‘이탈신고’를 하면, 근로자들이 ‘불법’이 되니까, 지금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복귀해야 해요.”



화가 난다.



“아니, 이렇게 추워서 취사하고 목욕하는 공간의 물들도 꽁꽁 얼어붙은 데다가, 화장실도 없고, 난방도 안 되는데 그 곳으로 돌아가란 말이에요? 노동자들이 창피해서가 아니라, 추워서 절대로 거기로 갈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지금 일터를 떠나면 안돼요. 일터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안 된 일이지만 고용센터는 직권으로 노동자들의 사업장을 변경해줄 수 없어요. 사장님이 허락해야 돼요.”



하는 수 없이 관할 노동청 근로감독과에 다시 진정을 하였다. 진정요지는 첫째, 매월 300~315시간씩 일했는데 월급을 1,034,000원을 지급한 것, 둘째, 화장실이 없고, 근로자들이 화장실을 요구하자, 사장이 노동자 1인당 2,000,000 만원씩의 금품을 요구하는 등 현실적으로 주거와 근로가 불가능하다는 것. 한참 머리를 극적이던 근로감독관이 말한다.



“아무리 알아봐도, 근로기준법이나 노동관계법령에 화장실에 대한 규정이 없네요.”
“그러면 조사 안하실거예요?”
“하기는 할 텐데, 임금 부족분에 대해서만 조사할 수 있어요. 화장실에 대해서는 사용자에게 구두로 ‘권고’할 수는 있지만 법령에 명시된 것이 없으니 강제할 수 없어요…….”


 


그렇다.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등에서 ‘화장실’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니, 근로감독관들이 머리만 극적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안전하게 배변하는 것”은 생존권적 기본권이 아닌가? 그런데 정부기관이 현행법이 보장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데도 극도로 인색한 상황이라면, 명문으로 규정되지 않은 권리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기다리는 게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다.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화장실 없는 노동자들이 어깨동무하고, ‘노동청에 가서 원 없이 똥을 누는 운동’ 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01




02




03




04



첫 번째 이야기 손님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김이찬


두 번째 이야기 손님


외톨이 점심시간이


아픈


김명희


세 번째 이야기 손님


일상의 자리를


되찾고 싶은


고동민 


네 번째 이야기 손님


기억되고 기록되는


공간을 열망하는


 



 


 


※ 사진출처 : [비마이너]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 [보러가기]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1)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 최현숙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일곱 번째 이야기손님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에 선 돌봄노동자, 최현숙


 



 





여성 / 나이 만 56년 8개월 / 활동가(진보정치, 노동운동, 인권운동) / 요양보호사 / 글쓰기 / 만 29세의 아들과 동거 중




과거




– 수많은 무임금의 노동들 : 가사노동, 사회운동 활동가




– 임금을 받으며 한 노동의 종류들은 결혼 전의 영업사원(약 6개월)에 이어, 남편의 사업 보조, 중고생 수학과외, 사회운동가 (활동비 / 천주교 사회운동 상근자, 진보정치 당직자, 노동운동 상근자 등), 약간의 글이나 강의 수입 등이었다. 경제 상황만을 놓고 볼 때, 40대 초반 4년간의 “중고생 수학과외”의 수입으로 이제껏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 만 52세(2009년)에 시작한 요양보호사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임금노동. 




– 돌봄 노동(간병, 요양, 장애활동보조, 산모신생아 도우미 등)은 거의 모두 여성 베이비부머들(현재 5060세대)이 하며, 국가 복지의 확장 속에서 가정내 여성의 무급노동이 가장 싸구려의 사회노동으로 전환 된 것.




– 대부분 최저임금(현재 시급 4860원)이 적용되고, 대부분 시급노동이다. 잦은 당일해고를 비롯한 일자리의 불안정, 최하위의 임금, 부당노동 요구 등으로, 대부분 실업과 비실업 및 돌봄노동간 +청소/식당/가사도우미 등의 노동들을 들락거린다. 




– 진보정치(+성소수자인권) 활동가로서의 경력으로 노동운동 내에서 일정한 활동 이상에 대한 배제를 경험했고, 노동운동 활동가의 경력으로 현재는 돌봄노동 현장에서 취업이 어렵다. 




– 현재는 글쓰기 작업을 위해 최저임금 노동마저 포기한 실업상태이며,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우면 최저임금의 시급 노동자로 1일 4시간의 요양노동을 할 예정이다.(최대 월 50만원)




미래 




– 국민연금 미적용 / 국민기초수급 대상자 아님 / 자식의 부양능력 현재로서는 불가. 




– 신자유주의 사회가 생산/홍보해 대는 욕망들의 와중에서, 나의 실존적 욕망을 직시하며, 이를 위한 지출과 수입을 조정하고, 자존감과 자괴감의 정체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여 나누며, 끝까지 사회운동의 활동가로 살로서 나와 사회를 행복하게 하는 활동을 하며 살 예정.




– 적정한 시점에 의료와 적정한 거리를 두고 죽음을 통과할 예정






가난한 베이비부머 여성들의 전반적 상황




– 1954년~ 1960년대 초반 출생 / 가난한 어린 시절 / 산업발전 사회에서 최하위 노동(식모, 차장, 공장노동, 건설현장 등) / 결혼을 통한 경력 단절 + 육아와 가사노동을 하며 노동/비노동의 경계에서 경제활동 단속/지속 / “산업사회 역군“(현재 통칭 베이비부머 세대)으로 불리우는 남편과의 가부장적 관계 / 4050을 전후로 한 남편들의 사회적 퇴출 + 본인들의 양육, 돌봄 노동 축소 + 가계의 보조/주체적 책임을 위해 노동현장으로 나옴. (유통/식당/청소/돌봄 등의 노동) + 자영업 폐업 등




– 사회/임금 노동을 계기로 가정을 넘어선 여성/노동자/시민으로서의 자아와 자신감 찾기 경험(가정 내 가부장적 억압의 약화) 




– “노동자 정년 60세 제도화” 논란 과정은 법과 사회가 여성/베이비부머들을 노동자의 범주에 넣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이고, 남성의 생애 주기에 맞춘 것이며, 현재의 남성들에게조차 실제적 적용이 어려운 제도임. 




– 대부분의 돌봄 노동자는 5060세대 여성이며, 그 중 특수고용 노동자(근기법 적용 안됨)인 간병은 6070세대 여성들이 하다가 현재는 중국교포 여성 노동자들이 8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 (간병비의 제도화는 시민과 노동자들에게는 절실한 의제)




– 건강 퇴조, 노후의 경제적 준비 미약 +부모 돌봄의 의무 + 자녀세대의 미독립 등으로 경제적 가난은 여전. 




– 미래에 대한 불안, 신자유주의가 생산해대는 욕망, 물질만능의 평가 기준들 속에서의 자괴감, 우울증




– 뒤늦은 사회적 경험을 통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욕망과 여유/자유 경험




– 개인의 생애와 현황과 미래에 대한 사회화의 과제 : 여성/인권 운동, 지역/정치운동, 노동운동의 과제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첫번째 이야기 손님


모자이크로 덧칠해져 있는


상처를 이겨내고 싶은


정욜



두번째 이야기 손님 


평범한 삶의


차이와 차별을 다시 묻는


김광이



세번째 이야기 손님


잃어버린 시간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


 



 


네번째 이야기 손님


구별과 경계를 뛰어넘어


함께 사는 세상을 원하는


정혜실 


 
























다섯번째 이야기 손님


자기소개 시간이 싫은


공기



여섯번째 이야기 손님 


난 사장이 아니라는


유명자



일곱번째 이야기 손님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에


선 돌봄노동자


최현숙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1)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 유명자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손님 


난 사장이 아니라는,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지부장)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에 대한 “반여성,반교육,반노동” 재능교육의 노조탄압! 그 심각성은 인권침해의 수위를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상실케하고 있다.




– 노동조합 설립과 배경


1999년 12월, 재능교육의 학습지 노동자들은 현장의 열악한 근무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파업에 돌입한다. 또한  합법적 노동조합의 권리를 갖고자 노동부를 향한 노동조합 설립필증 교부 촉구를 위한 투쟁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9명의 발기인으로 시작하여 전국 3천여명의 교사가 파업에 돌입했던 33일간의 파업으로 노동부는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내주었고, 재능교육은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우선 협약 체결로 손을 들었다. 이후 재능교육과 재능교육교사노동조합(현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은  2000년 5월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 노동자성을 없애기 위한 현장에서의 사측의 공세


그러나 재능교육은 노동부가 노동조합 설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현장의 업무형태들을 근본적으로 전환, 수정하게 된다. 교사에 대한 회사로부터의 종속성과 업무지휘․지시․감독, 즉 노동자성 인정의 근거가 되는 모든 업무형태들을 없애기 시작한것이다. 그 예로




* 매일 출․퇴근을 없애고, 아침 조회 및 업무일지 작성 중단


* 교사들의 집체교육 전면 중단


* 단체협약 내 노동자성 용어 삭제; 예/ 사무실 출근→사업장 방문, 근로조건→일하는 조건, 임금→수수료 및 수당, 휴가→2부 관리 등.




– 전면적 노조 탄압 돌입


2000년 단체협약 체결 후, 회사는 노조 무력화를 회사의 경영 방침으로 정하고 노동조합의 조직율을 낮추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인사고가의 최우선 평가가 되는 이를  위해 현장 조직의 관리자들은 항시 지국의 노조 조직율을 체크하고, 회사에 의한 조합원 탈퇴 작업 매뉴얼을 만들어 실시한다. 이는 회사의 고위 경영진들의 회의 자료를 통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 조합원 매일 면담 실시; 탈퇴를 종용하며, 회유, 협박


* 열악한 교실 배치; 원거리 지역, 회원이 적은 지역, 사고 지역 등.


* 지국 내 고참 교사, 가족을 통한 탈퇴 공작


* 영업 실적 저조를 이유로 계약해지 협박, 탈퇴 유도


* 간부를 표적으로 계약해지 사유를 조작, 실제로 노조 창립 초기 수십명의 조합원 일방 계약해지 당함.(현재 10년이상 된 재능교육 해고자 복직 투쟁 중)


 


이외에도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버티기 힘든 조합원 개개인의 수 많은 사례들이 있다.




– 2000년 이후 등장한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 부정


재능교육은 상습적 단체협약 위반으로 노동조합 무력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위의 행위들로 완성해간다. 노동조합 가입과 직결되는 단협 조항에 보장된 신임 교사들의 집체 교육 중의 조합 홍보시간을 전면적으로 차단하기 시작한다. 교육 중 교사를 빼돌리기, 가입 교사 확인 후 회유로 탈퇴서 작성케 하는 등 단지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서슴치않았다. 4-5년간의 사측의 이러한 작업들은 실제로 조합원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많은 조합원들이 탈퇴, 또는 회사를 떠나갔다. 심지어 노동부는 이에 발맞춰 자신들이 인정한 합법적 노조를 부정하며 재능교육 측의 수많은 단협위반․ 부당노동행위․노조탄압들에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근거로  묵인․방조해오고 있다.  




– ‘단체협약 원상회복․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2000일간의 농성 투쟁


재능교육 노사는 2000년 단체협약, 2001년 임금협약, 2004년 임금단체협약, 2007년 단체협약을 갱신 체결해왔다. 1600일이 넘는 투쟁의 원인이 되는 2007년의 단체협약은 수년간의 노동조합 무력화를 완성한 회사의 자신감속에서 노동조합이 굴복한 단체협약 체결이었다. 문제는 임금제도의 개악이었다. 이에 현장의 조합원들은 투쟁으로 결의하게 되었고, 2007년 12.21일 천막노숙농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재능교육은 수수료제도전면재개정을 위한 노조의 보충교섭을 거부하며 대화가 아닌 폭력으로 노조의 쟁의 활동을 탄압해오고 있다. 재능교육측이 조합원들을 상대로 1600여일간의 반여성․ 반노동․ 반교육적으로 자행한 수많은 탄압의 정당한 단 하나의 근거는 ‘학습지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2005년 대법 판례이다. 재능교육 측이 노동자가 아니어서, 즉 노동조합이 불법임의단체라고 주장하며 자행한 1650일간 자행한 탄압 사례들을 보면




* 단체협약 일방파기로 현장의 노동조건 극악해짐


* 노조 활동을 이유로 간부 일방 계약해지, 노조탈퇴 거부하는 조합원 집단 계약해지


* 조합원의 농성에 대해 ‘방해금지 가처분․접근금지 가처분’으로 대응하며 이의 위반을 이유로 통장 가압류, 살림살이 압류, 임금 100%압류, 차량 압류, 살림집 압류, 노조 사무실 압료 경매 처분, 신용불량명부등록, 20억 손해배상 소송 등으로 조합원의 목줄을 죄는가 하면,


* 구사대 직원을 직접 동원한 20여차례의 천막 폭력 침탈


* 여성 조합원이 다수인 점을 악용하여 용역 깡패를 24시간 대기시키며 성희롱․성추행․언어 성폭행․미행․상습 폭행, 노조측의  본사 앞 집회 신고 막기 등의 일을 위해 2년이 넘게 용역을 고용해왔다. 실로 교육 기업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짓들을 서슴없이 해오고 있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지난 5.22일부터 재개한 노사 교섭에서 회사 측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불법단체이기 때문에 위의 일련의 행위들이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정당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능교육지부는 10여년의 노사관계 속에서 합법적으로 체결해왔던 단체협약을 일방파기 한 것에 원상회복을 요구, 정당한 조합원의 쟁위 활동, 부당해고를 철회 요구를 해왔다. 단지 노동자가 아니라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서 1650여 일 간 재능교육이 자행한 노동탄압이 당연하다고 뻔뻔하게 주장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가 바로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참담한 현실이다. 또한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 이윤을 위해서만 쓰여지는 도구로만 인식하는 자본과 정권의 본질을 보여주는 노동형태가 바로 특수고용노동자이며 현재 재능교육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노동자성 부정은 곧 자본에게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모든 폭력과 불법을 용인, 방조를 넘어 정당성까지도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공조하는 사법부, 노동부, 입법 기관인 국회도 이에 대한 책임으로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전국학습지노동조합 재능교육지부의 요구는 ‘단체협약 원상회복·해고자 전원 원직복직’입니다. 


2000일, 재능교육지부와 학습지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보장의 위해 우리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1)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 공기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손님 


자기 소개 시간이 싫은, 공기


 



 


 



2011년 아마 11월 수능이 있었던날 나는 당차게 대학입시 거부를 했었다. ‘투명가방끈’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그 당시 해당학년 93년생들 말고도 그 이후 대학을 들어갔다가 대학거부를 선택했던 사람들과 20대 초반에 사람들이 같이 대학거부를 했었다. 나 같은 경우는 대학에 들어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싶었던 게 아직 없었고, 그 높은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어쩌면 대학거부라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내가 대학에 가지 않았다는 선택의 이 꼴이 공부를 하지 않겠다 라거나 한국 사회 안에서 대학을 들어가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삶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외로움 혹은 배제의 싸움일수 있겠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하게 되고 그랬을 때 내가 들어갈만한 공동체라거나 사회가 부여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에 친구들은 어느 학교에 소속되어 어떤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있고 그런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 질문이 너무 자연스럽게 끊기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질문이라는 게 과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계급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까 같은.


 


나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학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그게 내 인생에서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일찌감치 원하든 원치않든 대학교에 들어가 나를 설명할 말을 부여받고 그대로 살아갔을테니까. 




그러나 그만큼 내가 대학거부를 선택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한다. ‘대학은 왜 안가신거예요?’ 사실 이쯤되면 쫌 양호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대부분에 사람들은 저러한 과정 없이 ‘몇 학번이세요?’ 혹은 ‘무슨 과/학교 다니세요?’라고 자연스럽게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들에 갈증을 느꼈을때 겪는 감정들이 있었다.




‘대학거부’를 했을 때 나는 같이 대학거부를 한 친구들에게 많은 위안을 느꼈고, 그건 나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생각은 아직도 변치않았고, 주변에 대학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젠 ‘불안함’도 덜 느끼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은 ‘이후의 삶’을 고민했을 때다. 대졸이라는 학력없이 내가 이 사회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갈증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투명가방끈이후에 대학입시거부 운동은 축소되었고 그때에 막연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다.




‘운동’의 일부로써 ‘선택’이라는 일부로써 시작한 운동이 이제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지지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느낄 때. 그때 절망감을 느꼈던 거 같다. 누군가는 왜 대학을 거부하냐고 이사회에서 불리한 선택을 왜 운동으로 개인의 몫으로 남겨지냐고 그냥 우리 같은 사람들도 대학을 선택할 수 있는 공공성이나 교육을 만들어달라고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냐고 했을 때 머릿속이 꽤나 복잡해졌었다. 아직까지도 대학에 갈 마음은 없지만 제일 큰 게 등록금문제이고, 배우고 싶은 과나 공부들이 없다는게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붙잡지만 여전히 ‘대학’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 고민거리가 될 것 같다.




이것을 나이로 연결시켜 보자면 아마 20대 중후반까지는 겪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자기소개를 할 때 학교나 학번 등을 얘기하지 않고도 상대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는 대화들을 원한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이 나이가 어린것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불리한 위치’가 되는게 아닌 관계들을 원한다. 상대방을 뭐 하는 사람인지 알기위해 자신의 학벌과 학번들이 꼭 필요할까? 물론 이 구분들은 그 사람을 기억하기 쉽게 하거나 같은 공동체 안에 소속원으로써 분류하기가 쉽기 때문에 쓴다는 것은 알지만 그런 분류들을 밖으로 가져와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학벌이나 나이많음이 개인의 사이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힘을 가지게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나를 표현하는 말들에 어떤 차별이 있는지 무엇을 양산하는지 경계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아직은 좀 어렵고 나도 헷갈리는 길이긴 하지만.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1)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 정혜실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네 번째 이야기손님 


구별과 경계를 뛰어넘어 함께 사는 세상을 원하는, 정혜실 (Transnational Asia Women’s Network)


 



   


“이주노동자 그리고 한국여자! 그들의 금지된 욕망에 관하여”


 


연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만 통한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내가 원하고 상대방이 원하면 그 누구하고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 온 무슬림 남성과 연애를 시작한 그 순간과 결혼을 통해 알았다. 연애와 결혼 그것은 개인의 선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금지된 욕망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특히 그가 이주노동자라면 말이다.


 


내가 결혼했던 당시 90년대에는 국제결혼 자체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때로서 한국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문제되던 시절이다. 그것은 변함없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가부장적 남성들의 시선이다. 과거에는 양공주라는 호명으로 불온한 성적 욕망을 실현하는 문제적인 여성으로 폄하했던 그들은 지금 이주노동자들의 비자 취득 목적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 여성이거나 뭔가 모자란 여성들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하려는 여성이 연상이거나 이혼의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면 반드시 위장결혼이나 이용당하는 피해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한국사회에서 나이 많은 여성이 어린 남성과 결혼하거나, 이혼녀가 다시 결혼을 하려거나, 장애여성이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말해주고 있는 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는 뭔가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거나 ‘금지된 욕망’을 실현하려는 여성들이라는 ‘편견’과 ‘왜곡된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편견과 왜곡은 정책을 만들고 실현하는 정치가나 법률가 그리고 공무원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제도화가 되어 차별을 만드는 합리적 근거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최근 제2차 외국인기본계획이 발표된 이후 영주자격전치주의라는 제도가 국제결혼에 있어서 국적취득과정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아직 시행되지 않는 제도이지만 그 시행을 위한 법무부의 출입국 직원들의 태도가 변화고 있고, 국제결혼한 결혼이주민에게 부여되는 비자타입이 F-2에서 F-6로 바뀌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경남지역의 한 출입국사무소에서 F-2로 5년간의 결혼생활을 해왔던 한 파키스탄커플은 비자연장을 위해 출입국을 갔더니, F-6로 비자타입의 변경되면서 남편의 가족관계증명서를 파키스탄으로부터 다시 받아야 와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남편의 가족들이 서류를 빨리 보내주지 않자, 출입국직원은 남편에게 다른 아내가 있을 거라며 이는 위장결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흥분해서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한 한국인 아내는 내게 상담전화를 걸어왔고,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파키스탄에 다녀오겠다는 남편 때문에 불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불안하다면 같이 다녀오라고 했고, 다녀온 그녀는 그의 가족이 파키스탄에서도 아주 시골이라면 순박한 시부모님과 천진난만한 조카들을 만나고 왔다며, 이런 식의 출입국 ‘카더라’사실에 근거한 모욕적인 의심에 대해 분개했다. 파키스탄 출신의 이주노동자는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이슬람국가에서 왔고, 이주노동자들은 비자 목적으로 한국여성과 결혼한다는 속설들을 기정사실화 하고 싶은 반다문화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출입국 공무원들은 이런 식으로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 한 한국여성들의 결혼생활 자체를 흔들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한국으로 오는 이주노동자 연수과정에서 한국정부로부터 한국여성과 결혼하는 파키스탄 남성이 많아서 문제라며 이주노동자 쿼터를 줄여야겠다는 소리에 파키스탄정부는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여성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다고 하니, 이주노동자의 연애와 결혼은 한국 땅에서 금지된 욕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족 동반도 금지된 한국사회에서 이십대와 삼심대를 보내는 이주노동자는 자신들의 금욕의 생활을 요구받는 기계처럼 일하는 도구로만 취급받는다. 한국여성이 아닌 같은 나라 출신의 여성과 설사 연애를 하고 결혼을 꿈꾸어도 그들은 오전한 가정을 꾸리기 힘들다. 캄보디아에서 결혼 하고 따로 따로 농업이주노동자로 들어 온 신혼부부는 경기도와 경상도로 분리되어 살아야만 하고, 이 때문에 직장이동을 원해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이주노동자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그 아이들은 부모가 미등록이면 자동으로 미등록자가 되어 부모들의 불안한 체류상태로 인해 교육이나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특히 대학도 직업선택의 자유도 없어서 한국에서는 꿈을 가질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은 그저 ‘금지된 욕망’일 뿐이다. 




‘차별’은 인식에서 시작되고 제도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억압하고 위계화하고 배제한다. 이주노동자 없이 제조업도 농업도 어업도 건설업도 굴러가기 쉽지 않은 생산현장에서 필요해서 불러들인 사람들을 우수인재가 아니라고, 투자자가 아니라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의 문제이고 우리사회 인식의 문제이다. 단지 인종이나 피부색 문제만이 아니라 학력이나 재산, 국적, 신분 등 아주 복합적인 차별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이주노동자라는 것이다. ‘사랑’이 낭만이 되고, ‘가정’이 편안한 안식처라는 것은 이 땅에서 누구에게는 선택의 문제라면 누구에게는 금지된 욕망이 되는 이 곳 대한민국에서 언제쯤 누구나 평범한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날은 언제쯤 가능할까?


활동보고

[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1)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 한종선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세 번째 이야기손님 


잃어버린 시간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 (『살아남은 아이』저자)


 



 


 



안녕하세요, 저는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인권유린 사건) 으로 알려진 그 형제복지원에서 1984년 에 입소하여 형제복지원 폐쇄되던 당일까지 살았던 한종선 이라고 합니다.




저는 제가 살아오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먼저 저희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희 가정은 아버지와 1남2녀의 어머니가 안계신 가정이었습니다. 저는 1976년 에 경북의성에서 태어났었고. 부산에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기전  9세의나이로 저는 부산 (봉례국민학교) 2학년에 다녔으며. 누나들 역시 저와 같은 학교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쉽게도 어머니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당시) 부산은행 근처에서 구두를 닦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당연시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무슨일을 추진했었는지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알수있는 일들은 없었습니다. 고작 9세의 나이의 꼬맹이 였을 뿐이니까요. 당시에 부산에 거지가 많다는 이유로 거리 부랑자 처리를 위해 부랑자(?)들을 시설에 가두게 됩니다. 아버지는 저와 누나를 파출소에 데려간후 잠시만 있으라며 파출소를 나가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출소 앞에 형제복지원차가 도착해 저와 누나를 형제복지원 차에 태우고 지옥같은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어떠한곳인지 말하기전에 형제복지원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같히 말하는게 맞을것 같아 같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형제복지원은 형제복지원 원장인 박인근 씨가 말하는것을 인용하자면 설립취지가 거리에 떠도는 부랑자들을 거두고 선도함으로써 종교를 통해 갱생의 길을 열어주고 다시 사람답게 살수있도록 도와주는 본인의 전재산을 털어 설립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형제복지원에 대해 이야기 할까 합니다. 형제복지원은 부산 주례동에 위치한 도심에 있었습니다. 주례동에 살았던 인근 주민들 조차도 형제복지원이라는곳에 대한 자세한 것은 모르고 그저 국가차원에서 진행한 사회복지 사업 일종의 하나로만 보았을뿐 부랑자들만 수용된 곳인줄로만 알고 있을 정도 였지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형제복지원은 말그대로 지옥이었다고 표현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표현 하면 제3자 입장에서 잘 이해가 안되신다는것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표현력이 짧다 보니 어떤말로 형제복지원을 표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겪은 형제복지원은 지옥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9세의 나이에 그리고 12세의 누나와 1984년 어느밤에 형제복지원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3년여를 살면서 제가 보고 들었던거 당했던 일들을 이자리서 모든것을 다 이야기 드릴순 없지만 간략하게 몇가지만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구타는 기본이고 기합과 고문, 성폭행 동성간에 성폭행과 강제노역 등은 매일매일 이뤄졌으며, 그로인해 12년간 형제복지원 자체기록만으로 사망자 수가 513명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은 사망자들 시체는 부산인근병원으로 시체 해부용으로 일부 300-500만원씩에 팔려 나갔습니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인원은 대략 3500 여명 이었으며,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소 였습니다. 당시 1980년도경 정부에서 지원받은 예산이 년간 20여억원 이었습니다. 사람수대로 예산이 책정이 되고 편성되던 시기였다 보니 시설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부예산을 받을수 있는 금액은 커져만 갔습니다. 




여러분들은 티브이에서 북한 에 대한 뉴스를 많이 보셨을겁니다. 무슨 행사때마다 온 국민이 나와서 방송 카매라를 향해 만국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해맑게 웃는 모습등과 군대가 각잡아서 행진하는 모습들을 많이 뉴스를 통해 보셨을 겁니다. 실상은 온국민이 지금 당장 먹지도 못해 영향실조에 걸리고 굶어 죽어가는것을 잘 알고 있지요? 제대로 먹지를 못해 화단 정리 하며 돌아다니는 지네도 산체로 먹어도 보았고  솔방울을 따서 껍질을 이빨로 갉아 내어 안에 있는 것을 먹었고. 새로 자라나는 세순 솔잎을 따서 먹고 황토와 같은 진흙덩이를 햇볕에 말려 과자처럼 먹기도 하였지요. 당시 형제복지원 에서 살았던 대부분원생들은 99퍼센트 정도가 영향실조에 허덕였으며. 앙상하게 뼈만 남은체 하루하루 기합과 고문 구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밤에는 동성간에 성폭행을 당하며 살아왔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형제복지원을 지옥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곳에서는 정상적인 사람들은 결코 살아남을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버리고 짐승과 동물이 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개와 돼지보다 못한 짐승이 되어야만 했고.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아마 형제복지원 에서 사셨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당시 아동소대에 있었거나 나이가 30대 미만이었던 사람들만이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의 충격으로 인해 지금도 정신병원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장애를 갖게 된  아버지와 누나 역시 다시 정신병원에 잡혀가지 않으셨다면 아마 아버지와 누나 역시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후 사회로 돈 한푼없이 쫒겨났던 형제복지원 다른 분들처럼 아마 부산 어느 길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차가운 땅에 묻혀 버렸겠지요…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후 1987년 부산거리에서 동사가 되었거나 굶어 죽은 사람들의 통계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부산 한지역에서만 부랑자들이 3500여명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시나요? 당시 내무부 훈령 410호에 의해 전국적으로 부랑자들을 대대적으로 시설에 가두게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은 그런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가둘수 있었고, 엄청난 예산을 정부로 부터 받아 낼수가 있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 잡혀오신분 대부분이 전국에 주소지를 두신분들이었습니다. 부산에 놀러 왔다가 주민등록증이 없어 잡혀 오신분, 밤늦게 술에 취해 거리에서 쓰러져 잠드신분. 반항기에 청소년들이 집을 나와 거리에서 잡혀 갔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게 되었지만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에게 훈장까지 두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욱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형제복지원에서 생활하는동안 젊고 이쁜 여자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나이 어린 아동들이 수백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매년 20여억원씩을 형제복지원에 주면서 형제복지원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감시 감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1987년 부산형제복지원 인권유린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형제복지원은 급히 폐쇄를 시키고 그안에 수용되어 있던 수많은 이들을 귀가 조치 하였습니다. 돈한푼없이 사회로 나온 그들은 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 끝에 거리에서 죽어갔습니다. 진상규명조차 없었고, 국정조사 역시 흐지부지 추진되다 말았습니다. 남은것은 형제복지원인권유린 사건에 관한 재판 만이 남았었으나 그 재판 역시 몇년을 끌어온 재판은 징역형 조차 2년 6월로 추징금도 없이 끝이나게 됩니다. 인권유린에 관한 첫단추인 불법감금이 무죄가 되었고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은 조사조차 재대로 되지 않은체 묻혀버리게 된것입니다. 당시 1987년 은 사건사고들로 대한민국이 한참 시끄러울때 였단것을 온국민은 기억 하고 있을것입니다. 1987년 하면 여러분들은 무엇이 떠오르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화운동 의 최고정점이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시는 분들도 있을것이고. 박종철 군 이 취조실에서 고문에 의한 사망사건 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많을것입니다. 그로 인해 민주화 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발화점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사건은 박종철 군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순간 묻혀갔고. 사람들의 기억속에 멀어질때쯤 재판 역시 축소은폐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사건에 대해 지금 조금이라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그때 그사건에 징역 2년 6월밖에 안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끝으로 제가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에대한 느낌을 간략하게 이야기 할까 합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민주화운동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당한 고통은 누구에게도 사실을 말할수 없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누구도 잘못을 인정않는, 누구도 사과 하지 않는, 그냥 당연히 너희들은 그런곳에 갇혀도 된다는 차별의시선 들이 저를 많이 힘들게 하였습니다. 부랑자라는 정의는 누가 정한 것이고 누가 행하는 것인가요?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서류 한장의 눈속임에 어마어마한 세금이 쓰여지고 사람들이 납치되다 싶이 끌려가고 죽어 나갔는데. 아무도 이런 사실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그러려니 모른 척 하고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요? 더 이상 우리를 차별 하지 말고 국민 한사람으로써 보아 주시고 지금 부터라도 진상규명을 해서 바로 잡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형제복지원 은 이름만 바꾸었을 뿐 지금도 그들의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악의 뿌리를 제거 하지 않으면 그 악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아실것입니다.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으로 얼마전 대한민국 이 떠들썩 했던 적 기억 하실것입니다.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역시 연루되어있고 지금 이 현실에도 형제복지원은 건재하고 그들의 재산은 엄청나게 부를 축적하여 지금도 떵떵거리며 부산에서 사회복지계의 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하루하루 겨우겨우 노가다라도 뛰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아버지와 누나처럼 지금 현제까지도 시설이나 정신병원에 평생을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대한민국 맞나요? 당시 부산지검 지검장이었던 이는 국회의장을 지내고 형제복지원 사건 대법원 판사는 대한민국 총리를 하겠다고 나오고, 부랑자들을 시설에 가두라고 지시 했던 이는 29만원 밖에 없다며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 한복판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 드리는 부분은 당시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과 편견들에 의한 차별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많은 국민들이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아무리 부랑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가가 하는 일인데 설마? 하면서  암묵적으로 동조 하였기에 가능 했었던 일이라고 봅니다. 이곳에서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촉박한관계로 형제복지원에 대한 사실 을 담은 책들은 몇 권이 있습니다. 김영욱 작가님의 <생과사의 낮과밤>김용원 변호사(당시의 형제복지원 수사담당검사)님 의 <브레이크없는 벤츠>와  제가 2012년 5월부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만난 한예종 전규찬교수님을 만나 제가 기억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기억을 담은 전규찬 교수님과 박래군 인권운동가 선생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읽어 봐 주시고 어려운 내용에 책이라 회피만 하지 말아 주세요.. 피하고 모른척 하고 난 다 알아 했던 문제가 지금 현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 주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을 동정하기 앞서 먼저 대책을 새워주시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위로와 동정은 그 후에 해주셔도 된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 합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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