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세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Ⅱ
차별은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로 몰아넣고 가두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빼앗고 내 쫓습니다.
공장과 학교의 담벼락, 공공장소, 국경, 병원 문턱, 화단과 농사짓는 땅이 누군가에는 넘지못할 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
네 번째 이야기손님
쫓겨나는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자는, 미류
서울에 와서 처음 구한 집은 하숙집이었다. 2층짜리 다가구 주택에 옥탑 방이 하나 딸린 집이었다. 친구와 나는 옥탑 방에 같이 살기로 했다. 짐을 풀고 나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집을 구할 때는 그 딸만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학생이라고 했다. 칸칸이 쪼개놓은 쪽방에 두 명씩, 큰 방에는 다섯 명이 같이 살았고, 우리를 포함한 하숙생이 모두 29명이었다. 식당은 하나, 화장실은 두 개였다. 아침밥은 7시 반부터 8시 반 사이에 1층에 내려와서 먹으면 된다고 했고, 온수는 7시 반부터 8시 반 사이에 나온다고 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머리를 감을까 밥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한 번은 화장실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들어가 머리를 감는데 샴푸 거품을 막 내고 머리를 헹구려는 찰나에 온수가 뚝 끊겼다. 얼음 같은 냉수가 머리에 떨어지는데, 온수 대신 뜨거운 물이 눈에서 떨어졌다. 괜히, 서러웠다.
봄이 왔다. 동네 슈퍼를 지나가는데 탐스러운 딸기를 한 가득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과일을 먹어본 지가 언제인지, 친구와 함께 먹으려고 한 봉지 가득 딸기를 샀다. 집에 들어갔더니 단수 중이었다. 딸기를 씻을 수가 없어 한 편에 놓아둔 채 그냥 잤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전히 단수다. 딸기를 두고 그냥 나갔다. 저녁에 들어와 보니 물이 나오고 있었다. 딸기를 씻으려고 봉지를 열었다. 새빨간 딸기 위로 하얗게 핀 곰팡이. 혹시나 하고 곰팡이가 핀 딸기를 걷어냈지만 바닥까지 모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냉장고가 없어도 하루쯤은 괜찮겠지 했는데, 하나도 맛보지 못하고 모두 버렸다. 다시 괜히, 서러웠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지 않고 머리를 감았다. 학교 나갈 준비를 마치고 1층에 들렀다. 아주머니한테 뭐라도 얘기를 좀 해야겠다 싶었다. 뭔가 얘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댔다. 아주머니는 예의 친절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단수가 될 예정이었으면 미리 알려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주머니는 그걸 일일이 방문에 붙여놓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하루 못 씻는 게 그리 큰 문제냐 했다. “딸기가 다 곰팡이가 피어서…….” 말이 입 밖으로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사람도 많은데 한 시간밖에 온수가 안 나와서…….” 아주머니는 결국 친절한 표정을 버리고 한 마디 내뱉었다. “이래서 내가 여자는 안 받는데, 내가 있었으면 안 받았을 텐데.” 스물아홉 명의 사람이 한 시간 동안 밥도 먹고 씻기도 해야 하는 게, 여자라서 못 참는 일인가? “아주머니, 그건 여자가 아니어도 너무 심한 것 같은데요.” 아주머니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하숙생들이 고맙다고 인사하러 다시 찾아오는 줄 아느냐고. “그렇게 불편하면 다른 집 알아봐.”
“저 오늘 이사 갈게요.”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저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그래도 그냥 울고만 있기는 싫어서 용기를 낸 마지막 한 마디가 그것이었다. 그 말을 마치고 집을 나왔다. 동네 전봇대에 붙어 있는 광고지들을 보면서 전화를 하고 집을 보고 전화를 하고 집을 보고. 그렇게 집을 구한 후 학교에 있는 동아리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급하게 사람을 모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은 금세 가방에 들어갔고, 어딘가에서 동아리 사람들이 빌려온 리어카에 모두 실었다. 그렇게 그 집을 나왔다. 쫓겨난 것인지, 나온 것인지, 나도 알 수가 없다.
화창했던 하루의 기억. 서러웠던 여러 가지 일들 중 하나. 다른 일들이 그렇듯 문득 떠올랐다가 흐지부지 사라졌다가 다시 튀어나왔다가 어느 순간 숨어 버리는, 그런 일들 중 하나였다. 시간이 흘러 여성주의라는 말도 알게 되었고 주거권과 관련된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이사 나와서 들어간 집은 아파트의 방 하나를 세놓은 집이었다. 들락날락하기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너무 편안하게, ‘집’에서처럼 지냈다. 우리가 흔히 ‘집’이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편안함. 그래서 처음부터 좋은 주인을 만났다면 울면서 이사할 일은 없었을 텐데.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주거권과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 하는 우연에 따라 삶이 흔들린다는 것이야말로 모욕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차별 아닌가.
누구나 쫓겨나지 않는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걸, 쫓겨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해외 입법례를 보면서, 임대인이 임차인을 함부로 내쫓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집을 빌려 줄 때 전기나 난방, 온수와 같은 기본적인 설비들을 갖추고 보장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자라서 안 받는다.” 이런 말은,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함부로 못 할 이야기다. 많은 나라들이 성별, 인종, 나이, 가족상황 등을 이유로 주택 임대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여자라서”와 같은 말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회의 차별 수준을 보여준다. 물론 그 나라들에서도 이런저런 이유의 차별과 주거권 침해는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 전 그날, 차별금지법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 선택이 달라졌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원했던 건, 그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중 받는 집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으니까.
‘여자라서 안 받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살게 된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라는 건 내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스티커가 아니었다. 여자지만 먹고 씻는 문제로 불편하다는 소리 하지 않는 사람으로도 살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열심히 씻는 편도 아니지만 살라는 대로 맞춰서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차별이나 주거권 침해를 소개해 달라는 기자한테 알려주면 보나마나 “그것 말고 다른 사례는 없나요?”라고 할 만한 이야기다. 나 역시 이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나 여러 번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사소한’ 것들을 놓친다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며칠 전 읽은 존 버거의 <벤투의 스케치북>이라는 책에 마침 이런 말이 있었다.
“저항은 영(零)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있다. (…) 그 순간은, 지나가지만, 이미 출력이 되었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차별, 쫓겨남, 이런 말들은 언제나 거대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소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어떤 순간을 지목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나눌 때,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우리를 연루시켰고, 그래서 이 세상은 더 이상 우리와 무관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나는 쫓겨났지만 내 발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감각을 얻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지는 않겠다는. 그것이 나 혼자 크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만도 아니라는. 쫓겨나는 자리, 차별의 자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대한문 앞에서 평등을 예감하는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
세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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