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1)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 정욜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첫번째 이야기손님 

모자이크로 덧 칠해져있는 상처를 이겨내고 싶은, 정욜 (동성애자인권연대)


 



 




얼마 전 경향신문에 “한 30대 동성애자의 고백”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인터뷰에 응한 당사자는 알아보지 못하게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지만 그 기사를 두고 트위터에서 설왕설래가 있었다. 자칭 1세대 동성애자인권운동가라는 분께서는 ‘아직도 모자이크를 하고 나온 사람들이 있냐’며 비아냥거렸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 기사내용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비록 모자이크 뒤에 가려져있었지만 차별을 드러낸다는 것이 ‘용기’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비아냥 거리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에 당사자가 받았을 상처를 다시 말해 무엇하랴. 인터뷰이를 찾는 기자에게서 나 역시 연락을 받았었다.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겠다는 기자의 의도는 읽을 수 있었지만 ‘어떤’ 차별을 경험하고 있냐는 물음에는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별로 굴곡진 나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싫었는지, 차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스쳐왔던 일상을 의식적으로 차별이라는 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었는지 몰라도 차별을 굳이 설명해야 하는가에 대한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랬다. 




경향신문 보도이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차별을 드러낸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나 역시 모자이크로 처리된 인터뷰 당사자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했다. 커밍아웃을 자기만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며 모자이크로 일그러진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오만함에 동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모자이크 뒤에 가려진 인터뷰이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의 일부를 발견했고,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 차별의 경험들이 차별금지법을 구걸하는 듯 포장되어 있어 속상했다. 이 정도 차별이라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성소수자로 살며 행복했던 삶의 기록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삭제하고 차별의 역사만 연결지어 놓은 기사에서 공감과 위로는 형식에 가까웠고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은 당위를 강요하는 것에 불과했다. 




모자이크는 방패막이다. 사람들의 모욕과 혐오, 비난으로부터 받는 따가운 화살을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방패막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인터뷰에서 흔히 등장하는 모자이크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겠다는 의미보다 죄를 가리는 이미지로 인식된다. 동성애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죄책감, 그 죄책감을 씻어주지는 못할망정 보수 교계에서는 ‘죄’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자이크에 가려진 성소수자의 존재가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자신을 숨기며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일상은 늘 모자이크 뒤에 가려져 있다. 특히 노동하는 성소수자들이 모자이크 장막을 걷어내기란 더욱 어렵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침묵하고 가끔은 자신을 학대하는 결정을 내려도 침묵을 쉽게 깨뜨리지 못한다. 자신을 위한 유일한 방어수단이기에 함부로 비난할 수도 없다. 누군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궁금해 하지 않고 찾지 않으면 성소수자들의 삶은 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모자이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가족 앞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 앞에서, 성소수자 친구들 앞에서, 이성애자 친구들 앞에서, 동네이웃들 앞에서 내 모습은 마주하는 사람마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다르게 읽힐 것이다. 가시밭길을 비껴갈 때도, 맞서 싸울 때도 있지만 이 과정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내가 옳다’는 답을 모두에게 갈구하고 싶지는 않다.     




내 이야기를 하면서 아닌 척 하는 것만큼 아픈 것이 있을까. 모자이크로 처리된 인터뷰 당사자의 한 컷 사진이야말로 성소수자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된다. 90년초 HIV에 감염된 한 청년이 블라인드장막이 쳐진 뒤에서 리포터의 질문에 힘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았어도 실루엣을 통해 느껴진 슬픔을 ‘아직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차별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변화를 바라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다. 수신처가 불분명한 차별의 경험들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수신처를 함께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러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첫번째 이야기 손님


모자이크로 덧칠해져 있는


상처를 이겨내고 싶은


정욜



두번째 이야기 손님 


평범한 삶의


차이와 차별을 다시 묻는


김광이



세번째 이야기 손님


잃어버린 시간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


 



 


네번째 이야기 손님


구별과 경계를 뛰어넘어


함께 사는 세상을 원하는


정혜실 


 
























다섯번째 이야기 손님


자기소개 시간이 싫은


공기



여섯번째 이야기 손님 


난 사장이 아니라는


유명자



일곱번째 이야기 손님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에


선 돌봄노동자


최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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