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청원
취지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지 15년이 지났으나 아직 차별금지법이 없음. 헌법상 평등권 실현을 위해 국회가 바로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을 제정해주기를 바람.
내용
안녕하십니까, 저는 2020년 11월 16일 진행된 동아제약 하반기 신입사원 채용의 성차별 면접 피해자입니다. 그날로부터 약 6개월이 지난 오늘, 저는 대한민국 국회에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를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펜을 잡았습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본 청원의 목적이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소급입법을 통해 해당 기업에 중한 형사 처벌을 요구하거나 특정 종교의 교리를 반대하는 데에 있지 않고, 국가의 존립과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양심을 가진 시민으로서의 도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저는 평범한 20대 사회 초년생 직장인입니다. ‘평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사실 저는 그 ‘평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경험하고 향유할 기회를 국가로부터 약탈당했기 때문입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삶을 살던 저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각 부처의 장관을 움직이게 하는 거대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남들과 비슷’하게, 그러니까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만 25년의 짧은 인생의 탑을 쌓아왔으나, 사건과 동시에 그 공든 소망의 탑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평범’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평범’을 빼앗김으로써 부도덕한 사회의 얼굴에 새빨간 경고장을 붙이는 ‘비범’한 인간이 될 때, ‘평범’을 빼앗김으로써 다른 의미로 ‘비범’한 인간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제1항에서 천명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즉 주말에 지하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갈 권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권리, 자신의 능력을 펼칠 권리를 가져보지조차 못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적 약자인 이주민, 성소수자, 비정규직, 장애인, 저학력, 청소년, 여성들입니다.
저는 만 25년 인생의 대부분을 기득권으로 살았습니다. 유복한 한국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서울과 해외에서 거주하였고,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이성애자이자 비장애인이자 정규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6개월 전, 영원히 견고할 것만 같던 이 모든 권력이 단지 저의 성별을 이유로, 말라비틀어진 낙엽처럼 힘없이 바스러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다시 깨달았습니다. <국가>라는 책에서 플라톤이 말하듯, 모든 권력은 상대적이라는 사실, 또 그 상대성에 의해 나 또한 언제든 약자, 즉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이는 저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제 친구 지원이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면접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고, 대기업에 다니는 정현이는 아이와 함께라는 이유로 여러 식당에서 출입을 거부당했습니다. 지원이는 동성애자이기를 선택하지 않았고, 정현이는 그저 부모이고 싶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평범’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제게 말합니다.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국에서 아이 낳지 말라고, 너도 한국에서 있지 말고 외국으로 나가라고, ‘탈조선’하라고 말입니다.
국회와 정부는 우리나라가 인재가 외국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두뇌 유출 현상이 심각하고, 매년 출생률이 최저 기록을 경신하고 있어 국가의 존립이 위험하다며, 해결이 시급하다 말합니다. 저는 정부가 원하는 그 ‘해결책’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차별 금지법입니다. 경제지리학에는 관용(Tolerance)이 높은 도시에 인재(Talent)가 모이고 그 인재들이 모여 기술 혁신(Technology)을 만들어낸다는 ‘3T 이론’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가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두뇌 유출 현상과 저출생을 걱정하는 국회와 정부에 묻습니다. 대한민국은 지원이 같은 인재가 머물며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관용을 가진, 정현이와 아이가 마음 놓고 밖에 나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관용을 가진 나라입니까.
차별 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때마다 국회는 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라며, “차별 금지법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틀렸습니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국민인식조사나 그 외 여론조사를 살펴보더라도, 차별 금지법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매우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나답게’ 살겠다는 양심의 선언이자 보편적 도덕에 대한 포효입니다. 국민이 국회의 인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가 국민의 인식을 따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설령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충분치 못하다 할지라도, 제가 아는 한 대한민국은 제도가 바뀌면 국민들의 인식과 행동이 그에 맞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나라입니다. 실내 흡연 금지, 우측 보행, 마스크 의무 착용 제도에 국민들이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였는지는 저보다 국회와 정부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차별금지법에 있어 법과 제도가 사회적 합의에 우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벽은, 세우는 쪽이 무너집니다. 동독과 서독 중 어디가 벽을 세우고 붕괴하였으며, 인종 청소를 통해 다양성에 벽을 세웠던 독일은 세계대전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사가 말해줍니다. 동독이 붕괴했고, 독일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달랐습니다. 다양성의 벽을 허물었고, 독일의 인종 청소를 피해 도망쳤던 유대인을 두 팔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유대인 도피자에는 한나 아렌트가 있었고, 아인슈타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세운 찬란한 업적에 대하여서는, 굳이 하나하나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저는 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이도 낳고 싶습니다. 교수가 되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빛나는 연구를 하고 싶고,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주말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모두를 제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에서 하고 싶은데, 가능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가 되어도 한국에서는 성별을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능력을 펼칠 수 없을 것 같고, 아이를 낳으면 제 아이가 성 정체성이든 장애이든 비정규직이든 학벌이든, 그 어떠한 이유로든 차별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예측 가능한 미래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는 조국을 향한 기약 없는 짝사랑만 하다 지원이, 정현이와 함께 ‘탈조선’하여 미국으로 ‘쫓겨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를 보며 정부와 국회가 국민을 향해 벽을 세우고 있다 느낍니다. 역사와 연구와 현실이, 차별과 혐오의 제거가 국가 발전의 필수 조건임을 보여줌에도, 국회는 자신들의 나태함을 사회적 합의라는 핑계로 덮고 이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명백한 직무유기입니다.
제게, 그리고 우리에게 ‘평범’을 앗아간 국회는 직무유기를 멈추고 이제 답하십시오. 그토록 원하던 ‘평범’을 빼앗기고도 조국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읍소하는 파랗게 뜨거운 청년의 목소리를, ‘내가 나’로 살고자 하는 양심에 대한 국민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시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국회는 더 이상 그 누구의 평범도, 목숨도 앗아가서는 안 됩니다.
차별 금지법, 바로 지금입니다.
📌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 바로가기 : https://bit.ly/equality1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