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세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Ⅱ
차별은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로 몰아넣고 가두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빼앗고 내 쫓습니다.
공장과 학교의 담벼락, 공공장소, 국경, 병원 문턱, 화단과 농사짓는 땅이 누군가에는 넘지못할 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
첫 번째 이야기손님
늦잠 자는 시간을 사수하고 싶었던, 난다
“다들 1단원은 배웠지? 2단원부터 시작한다.”
학교도, 과목 별로 바뀌는 선생님도, 친구들도, 교실의 생김새도, 교복을 입는다는 것도. 모든 것이 새롭던 중학교 1학년을 떠올리면, 첫 번째 교과수업 시간에 이런 말을 하신 수학선생님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당시 나는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분당이라는 신세계로 전학 온 학생이었다. 자연스럽게 쓰던 내 말투는 반 아이들 모두의 놀림감이 되었고, 나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창피하고 주눅 든 마음으로 사투리 억양을 고쳤다. 안 그래도 낯선 공간에서, 전학생인 데다가, 말투 때문에 놀림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을 헤쳐 나갈, 이렇다 할 깡이 부족했던 나는 수학선생님의 그 첫 마디에도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 때 같은 반 친구들 대다수는 정말로 ‘다들 1단원은 배운’ 상태였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나 하나였을 것이다. 학원에 다닌다는 건 별로 생각해본 적 없어서 집에서 혼자 1단원을 공부했다. 그리고 1학기 중간고사 수학시험 점수를 받아본 후, 본격적으로 수학이라는 과목에 손을 놔버렸던가… 그랬다.
2007년, 고등학생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그 학교는 당시 많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그랬듯, 3월에 입학식을 하는 바로 그 날부터 강제야자를 시켰다. 그 날의 기억이 나에겐 꽤나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미학혁명(미친 학교를 혁명하라)”라는 학생인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날 이후 나의 삶은 아주 많이 달라졌다. 미학혁명에서 만난 이야기들은 그 동안 내가 나 혼자서만, 혹은 종종 학교 친구들과의 뒷담화로만, 꿍시렁거리던 바로 그 이야기들이었다. “두발자유”, “체벌금지”, “입시폐지” 같은 구호들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다양한 목소리로 외쳤던 그 장면은 그 때의 나에게 대단한 울림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꿍시렁거림”의 볼륨을 조금씩 높여갔다.
2008년에는 결국 학교 밖으로 나왔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휴대폰’이었다. 이 이야기는 꺼내자면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생략. 학교를 나온 것을 후회하진 않느냐, 라는 질문을 지금도 종종 받는데 ‘후회하기엔 이젠 좀 오래 지나버려서…’ 라고 반 농담 삼아 답하기도 한다. 그러다 최근 주변에 어느 활동가의 자녀분이 고등학교 자퇴를 고민하면서 상담을 요청받았는데, 오랜만에 그 때의 기억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자퇴를 고민하고, 자퇴를 선택했던 당시에는 일부러 더 “난 내 발로 나온 건데?” 라고 강하게 말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러나 지금 다시 그 때를 곱씹어보면, 선택이면서 선택하지 않음이었다. 비좁은 교실, 40명이 넘는 학생들, 친한 친구, 안 친한 애, 허구한날 치르는 시험 때문에 시험 보는 대열(한 줄)로 자리를 배치해서 짝꿍 같은 거에 더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 때. 일등부터 꼴등까지 대놓고 공개하진 않아도, 모두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던 서로의 성적, 끝이 보이지 않는 점수 경쟁. 변비에 걸릴 지경이 될 때까지, 의자에 종일 앉아있었지만 완전한 ‘내 자리’는 없었던 교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진짜 삶을 찾겠다고 학교를 나왔지만, 그건 결국 학교로부터 쫓겨남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학교 밖에서의 하루하루는 그 동안의 삶과는 많이 달랐다. ‘학교 안 다니는 애’라는 시선과 마주할 때는 조금 두려웠고, 시험기간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때는 그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해방감과 불안감이 섞인 묘한 기분이 한동안 나의 일상을 채웠다. 무엇보다 늦잠을 자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좋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침잠이 많아서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고역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무 이른 시간이다. 보통 12시 넘어서 잠자리에 드는데, 다음 날 ‘무단지각’하지 않는 등교를 위해서는 늦어도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으니까. 나의 고등학교 자퇴는 여전히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자발적’ 퇴교이면서도 동시에 쫓겨남이며, 수십 년(어쩌면 더한 세월)을 한결 같이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학교와 교육현실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면서도 동시에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 시작점이었노라고, 새삼스레 되짚어본다.
어쨌거나 그 이후, 2008년부터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것저것. 우리의 고민과 요구를 알리고 전달하면서, 우리 사회에 인권이 좀 더 단단하게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내가 인권을 만났던 것처럼. 그래서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처럼.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지금도 조금은 불안하다. 고등학교도 그만두고 대학교도 안 갔고, 정말 그냥 보면 나를 이 사회의 낙오자라고 부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시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사는 것을 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학교는 내 시간과 내 자리를, 박탈했지만 지금 나는 그 기억으로부터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청소년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금씩 만나고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학교와 세상으로부터 차별받고 외면당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곳곳에 흩어져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만 가다보면, 언젠가는, 지금은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좀 더 보편적이고 당연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을 만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인권의 가치를 품고 세상과 맞설 용기가 우리의 힘이 되어줄 거라고, 기대해본다.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세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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