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차별은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로 몰아넣고 가두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빼앗고 내 쫓습니다.
공장과 학교의 담벼락, 공공장소, 국경, 병원 문턱, 화단과 농사짓는 땅이 누군가에는 넘지못할 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
네 번째 이야기손님
기억되고 기록되는 공간을 열망하는, 몽
‘등’의 자리를 넘어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이라는 제목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성소수자에게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이 가능한 공간은 어디쯤인지를 생각해본다. 10만여 명의 서명으로 주민발의된 학생인권조례안에서 ‘성적지향․성별정체성’, ‘임신․출산’과 같은 논쟁적 차별금지사유들이 삭제될 위기에 처하면서 시작하게 된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당시에 성소수자 학생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떤 차별을 겪고 있는지 ‘사례’가 필요하다는 내외부의 요구에 <성적소수자 학교 내 차별사례 모음집>을 발간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단순히 제가 뒷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때려서 병원까지 간 적도 있고요. 길 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기도 하고, 넘어진 저에게 침을 뱉기도 했죠. 사실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어요. 모두가 똑같은 시선으로 저를 바라봤으니까요. 결국 학교라는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요.”
위의 사례가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학교는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배우는 공간’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모든 인간’에서 성소수자를 삭제하려는 서울시의회의 기만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에 어떤 단어를 대신한다 하더라도 차별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현실에 대한 씁쓸함 때문이었다. “결국 학교라는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요”, “결국 집/가족이라는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요”, “결국 직장이라는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요”….
성소수자들이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은,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정박해 있다거나 다른 구조들과 매개되지 않는 배타적인 경험의 속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성애중심 사회의 차별과 편견 속에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성소수자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비가시화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단 두 가지 중에 무엇이 덜 힘들 것인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조건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열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소수자로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즉, 사회적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감각과 사회적 관계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문제는 자기 자신이 되기 너무나 어렵다는 것, 그 열망을 승인받을 수 있는 관계와 장소가 너무나 요원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성소수자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익숙하게 위치 지워진 자리는 ‘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2007년 법무부는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며 차별금지사유 중 성적지향을 비롯한 7개 조항을 삭제하며 “등”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성소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공적 공간에서만큼은 결코 그 존재에 이름 붙이지 않고자 하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차별받을 수도 있는’ 개인이자 집단의 예시로서 등장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등’ 안에 포함되기를 거부하는 순간, 남은 것은 완전히 익명성에 녹아들어 삭제되는 것뿐이거나.
그런데 법/제도 앞에서의 ‘인간’을 재구축, 재규범화 하려는 최근 1~2년 간의 군형법 및 차별금지법의 답답한 상황들을 바라보며, 2011년 말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활동 당시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오늘은 참 역사적인 날’이라는 말을 자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역사적인 ‘오늘’의 순간은 아마 모두에게 다르게 기억되어 있겠지만, 모두에게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던 계기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12월 14일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이슈를 가지고 최초로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이라는 공공기관 점거농성을 시작한 날이기 때문에, 12월 19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성적지향을 비롯한 차별사유들이 삭제되지 않고 수정안이 통과된 날이기 때문에, 한국의 법제도에서 최초로 ‘성별정체성’이 차별금지사유로 명시된 날이기 때문에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인권을 특별하게 만들어서 조례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가 않습니다. … 성소수자, 임신ㆍ출산에 관한 문제, 이런 아이들을 보호해 주어야 된다는 논리로 말씀을 하셨는데 언제 우리가 그런 아이들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까? – 한학수 의원
그러나 뭐를 말씀드리고 싶냐 하면, 성소수자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현실에. – 김형태 의원
하지만 나에게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이 역사적인 공간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포함과 배제의 권력을 지우려는 시도 앞에서,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아예 삭제하거나 ‘보편적 인권’과 ‘평등’, ‘모든 인간’ 혹은 ‘모든 학생’이라는 추상적 그늘 아래 비가시적이고 비언어화된 존재로 위치지려는 시도 대신에, 우리 자신을 “존재하는 몸으로/보여지는 몸으로”, “얼굴이 있는 존재”로서 드러내며 그 시도를 경합하는 공적인 논의의 장 안으로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제235회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 6차 회의록’ 그 기록이, 본회의에서 ‘성적지향’, ‘성소수자’를 주제로 논쟁하던 장면을 지켜보던 기억이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경합의 과정에 청소년/학생 인권과 성소수자 인권을 결합시켜 고민할 수 있었던 만남과 갈등이 없었다면, 자기 자신을 대변하면서도 ‘우리’를 만드는 과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같은 소수자로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 입장 속에 있는 소수자들로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과정에서 ‘등’의 자리가 아닌 공적 공간을 어떻게 확장해 나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픈 이유다.
두 번째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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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
※ 사진출처 : [비마이너]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