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촉구 평등행진 <우리가 간다> 리뷰

김기홍(제주퀴어문화축제)

 

평등행진을 가는 날 기대되기도 했지만, 너무 너무 움직이기 귀찮았다. 비행기 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유독 올해 비행기를 너무 많이 탄 기분이었다. 이번만 비행기 타면, 올해는 더 이상 비행기 안 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애써 움직였다. 대충 헤아려보아도 육지에 10번은 다녀온 것 같은데, 내가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는 욕심이 있어 그 연대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려고 비행기를 탔다.

너무 너무 궁금해서 헤아려 보았다. 올해는 2월부터 매달 육지에 갔다. 일이 자주 있었다. 일이 자주 있었다. 호기심에 헤아려보니 왕복 15회, 비행기를 탑승한 것만 30회에 달한다. 이중 개인적인 용무는 딱 두 번, 나머지 왕복 13회는 모두 활동과 관련한 출장이었다. 심지어 그중 12회가 퀴어와 인권 관련한 출장이었다. 나 진짜 이제 전업활동가가 된 건가?

그 12회를 잘 살펴보았다. 왕복 6회가 각 지역 퀴어 축제와 관련한 출장이었다. 1회는 전국퀴어문화축제 연대 워크샵 참여, 1회는 인천에 기자회견에 연대였다. 2회는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사업비 수령을 위한 협약식이었다. 제주퀴어문화축제 이름을 단 것만 10회, 그걸 달지 않은 2회도 퀴어와 관련한 강의 1회, 국가인권위 광주사무소 필진 소집 1회로 올해는 진짜 활동가로 살았던 것 같다.

 

 

 

평등행진부터 시작할 수는 없었다. 제주난민인권을위한범도민위원회 소속된 단위의 장으로서 난민환영집회를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가장 화제였던 예멘인들이 있는 제주 거주자이기도 하고,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차원에서 소액의 분담금과 논평을 통한 연대 외에는 개인적으로 가서 연대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야겠다는 생각에 난민환영집회를 먼저 가기로 했다.

난민 환영 집회에 많은 퀴어 운동 단위들이 보였다. 다음날 광주퀴어문화축제가 있었지만, 각 지역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와 지역 운동 단위, 동아리 등 퀴어 인권 단체가 굉장히 많이 보였다. 퀴어운동 단위들은 모두 깃발을 들고 있었다. 집회에서 만나는 퀴어운동 활동가와 무지개 깃발은 너무나도 반가웠다. 퀴어 단체가 더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여러 단위들이 있었다. 인권운동더하기 소속 단체를 포함해 여러 단위들이 있었다.

난민환영집회에 있는데, 어디서 보았던 사람이 하나 둘씩 보였다. 동성애 반대를 이야기하는 혐오세력이었다. 제주에서도 퀴어축제 반대 세력이 난민 반대 세력과 많이 겹쳤는데, 육지라고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평등행진 첫 구간부터 동성애 반대,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분들이 지속적으로 따라왔다. 퀴어 운동하는 이들에게 워낙 익숙한 분들이라 무지개 깃발을 든 우리는 그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또 만나서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고생 많다고 환호로 그들을 맞이했다. 중간 중간 체력이 좀 부족하신지, 눈에 띄지 않을 때면 좀 서운했다. 그러다 첫 구간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면서 무거운 캐리어를 물품 보관함에 두기로 결정했다. 물품 보관함 사용이 서툴러 좀 오래 걸렸는데, 나와서 보니, 이미 행진 대열은 출발해서 다른 흔적으로만 이동 경로를 알 수 있었다. 그나마 가는 길이 눈에 보이니 깃발을 들고 열심히 뛰어 흔적을 쫓아갔다. 드디어 행진 대열이 눈에 보였는데, 하필 횡단보도 빨간신호에 걸려 움직일 수 없었다.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중 옆에서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동성애하면 좋냐? 부끄럽지도 않냐?”

내 성격이 그렇게 둥근 편도 아니고, 시비에 가만히 있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멀지도 않고 신호도 바뀌지 않은 데다 몇 걸음 떨어져 있지도 않아 찾아가서 얼굴을 마주치고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세요?”

“동성애 하는 게 자랑이냐?”

“저 동성애자 아닌데요?!” (양성애자이자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입니다)

“뭘 그렇게 동성애가 자랑이라고 자랑스럽게 행진하냐?”

“XX, 본인은 무슨 자랑이라고 이렇게 길거리를 다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기분이 팍 상해서 짜증을 내며 “나이 X먹은 게 자랑이라 좋겠다. 꼰XXX X나 부럽네.”

그렇게 욕설을 내뱉고는 신호가 바뀌자 다시 깃발을 들고 뛰어 원래 대열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자주 보던 혐오세력이 더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확성기와 피켓을 갖고 중간 중간 뭐라고 말했지만, 우리의 환호 때문에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굳이 굳이 6색 무지개 깃발이 있는 곳만 찾아 와서 떠들고 있었다.

평등행진 마지막 구간에서는 몇 년간 뜨거웠던 “오열맨”이라고 불리는 이와 최근 뜨거운 노력으로 반동성애를 외치는 그가 자주 보였다. 오열맨은 이번에도 같은 피켓을 들고 와서 사랑한다며, 기도로 오열하며 외쳐댔고, 최근 뜨거운 노력을 하는 그는 작은 휴대용 확성기를 들고 와서 확성기를 우리 쪽으로 향한 채 외쳐댔다. 거의 끝에 와서는 좀 지쳐보여 안쓰러웠다. 혐오는 역시 돈과 시간뿐 아니라 체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회 앞을 지나 마무리 집회를 할 때, 밥차가 찾아와서 우리에게 주먹밥을 나누어주셨다. 비건 주먹밥과 비 비건 주먹밥 두 가지가 있었다. 배는 고팠지만, 지쳐서 그런지 그렇게 여러 개를 먹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마무리 집회 공연을 감상했다.

 

 

 

그런데, 오열맨과 열정의 그가 함께 이쪽을 조용히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경찰이 없을 때면 별 행동을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라 그냥 지나가겠지하고 두고 있었는데, 나중에 G보이스 공연을 그렇게 넋을 놓고 보더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이왕 같이 걷는 거 그들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깃발을 들고 함께 혐오 반대를 외치며, 함께 즐겁게 행진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렇게 미움에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는 건지 너무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말을 걸기에 난 너무 지쳐서 귀찮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집회까지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뒷풀이를 했는데, 자긍심행진(퀴어 퍼레이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퀴어가 많이 모이기도 했지만, 퀴어 혐오세력이 옆에서 혐오의 말을 내뱉고, 동성애 나쁘다고 하는 것을 보니, 자긍심 행진하던 것과 너무나도 비슷했고, 자긍심 행진의 시작인 평등을 위한 해방의 행진(Liberation March)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한 편으로는 그만큼 지금 우리가 혐오의 흐름 제일 앞에 서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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