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110304 칼럼 : 우리도 법대로 살고 싶다고요

우리도 법대로 살고 싶다고요

우리도 법대로 살고 싶다고요 ① 내가 차별금지법에 꽂힌 이유

강위 (언니네트워크 편집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살다보면, 이게 뭐지? 하는 상황들이 있다.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건 분명 나인데,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당황스러움인지, 분노인지, 어이없음인지, 이 모든 것의 합인지, 맥이 잡히지 않는 상황. 며칠 전까지 내가 거주했던 건물의 주인은 나를 수차례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나이도 어린)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말을 넘어선 육두문자를 퍼부어 댔고, 그런 그를 향해 녹음기를 들이대며 “욕하지 마세요. 녹음하고 있어요.”라고 말하자 “젊은 X가 어떻게 살아 왔길래 이렇게 나오냐”며 “니가 그렇게 법을 잘 아냐”고 삿대질을 해 댔다.


그날 이후, 그 대단한 ‘건물 주인님’(당신이 건물 주인이지 내 주인님이냐고, 허허허)은 회사로 전화를 걸어 내 직속 상사에게 싸움의 경위는 물론, 치명적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내 사생활을 폭로하기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몇 달 뒤 계약 종료일이 지났음에도 방이 빠지지 않으면 “돈을 못 준다”라는 문자를 당당하게 보낼 즈음, 나는 어서 빨리 이 ‘똥 밟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삿날, 내리는 비 때문에 이사 일정이 지연되자 그분께서는 “돈 줬으니 당장 나가!”라며 길길이 날뛰는 위엄을 보이셨으니, 묵묵히 재빠르게 손을 놀리던 친구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들이 아니었어도 저랬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누가 봐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건물 주인의 행태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치명적이지만, 그의 만행이 유독 응어리가 된 이유가 있다. 도대체 그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내가 ‘만만해 보여서’이지 않을까. 내가 자기보다 어리고, 힘도 없어 보이고(덩치도 더 작고, 가진 것도 더 없고), 혼자 사는 여자니까, 그 정도 욕지기는 퍼부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나의 정체성이나 내가 처한 상황(비혼 여성, 저연령자, 세입자) 때문에 불합리한 폭력을 당하다 보니,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것에 절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나를 구제해줄 무언가를 바라고 찾게, 되더라.



“법대로 해!”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그래, 마포구 창0동 6-113번지 건물 소유주 국 모씨가 한 가지는 제대로 짚었다. 내가 처음부터 나한테 욕하는 사람에게 녹음기를 들이밀지는 않았다. 지금보다 내 심장이 보드라웠던 시절, 사람들이 뭣하러 ‘삭막하게’ 법 조항을 들먹이며 소송 같은 걸 하는지,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데 막 되먹은 건물 주인님 같은 분과 부대끼며 살다보니, 도무지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엉킨 실타래를 풀기보다는 가위로 싹뚝 끊어내는 심정으로 “경찰 불러!” “법대로 해!”를 외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호기롭게, 법대로 해!


하지만 그 분께서 완전히 잘못 짚은 부분이 있었으니, ‘어떻게 쓰일지 모르지만 일단 증거를 확보해 놓자.’라는 정도의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내가 법에 대해서 잘 알 거라는 의견은 자신의 광적인 퍼포먼스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새로운 인종(?)을 처음 접해본 충격으로 인한 과대망상일 뿐이다.


법대로 해 보라고? 그래, 나도 그러고 싶다. 너무나 얄밉게도 그 분도 이미 알고 있다. 법이 쉽게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내게 법이란 너무 어렵고 근엄한 대상인지라, 그 분 앞에 서기 전에는 늘 내 자신을 수백 번 점검하게 된다.

나를 도와줄 법이 있기나 한 건지, 있다면 그 법이 몇 조 몇 항인지 모르는 것에 대한 막막함을 시작으로, 내가 겪은 일이 명백한 폭력인지 자기 검열을 하다가,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를 괜히 크게 만드는 것 같은 불안을 지나, 법대로 하려다가 시간과 돈만 깨지고 실제로 얻는 것도 없을 것 같은 초조적 상태를 찍고,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갈까 하다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라는 뾰족한 마음을 먹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지지부진해지고, 그러다 불쑥,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이 마치 내가 못나서인 것 같고, 내가 원래 지지리 박복했다는 신세 한탄에 이르게 되면, 이놈의 세상, 뭐 이 따위야, 내 인생 왜 이래,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나와는 상관없을 줄 알았던 그 ‘법’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내게 꽤나, 절실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넘어선 물증을 가지고 있어서였을까. 지난 1월 15일 열린 LGBT 인권 포럼과 1월 29, 30일에 열린 언니네트워크 회원 워크숍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강연은 유난히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차별을 금지하겠다며 차별을 조장하는 법은 가라


여기서 잠깐. 차별금지법 제정이라고 하면 ‘차별금지법? 그거 이미 있잖아.’라고 말할 언니들,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사에 관심 많은 언니들은 이미 알다시피, 차별금지법은 문자 그대로 사회에 팽배한 차별을 막기 위해 제정된, 아니, 그렇게 제정됐어야 할 법이다. 한데 2007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던 당시, 법무부는 입법예고안에 버젓이 들어가 있던 ‘성적지향, 학력, 병력, 출신국가, 언어, 범죄전력,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이 7개의 차별사유 조항을 뒷발로 슬그머니 지우고 법을 만들었다.


이때 삭제된 7개 조항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실수로 빠진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삭제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쯤에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보쇼, 법무부. 여기에 해당되는 차별은 계속 하겠다는 겁니까? 이 조항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차별받아도 된다’는 겁니까?”


‘차별금지법’이란 이름을 붙이고서 오히려 차별을 조장하는 법, 이런 법을 믿고 “법대로 해!”를 어찌 외치겠어? 라며 가슴을 쾅쾅, 발을 동동 구르며 분노한 것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누더기 차별금지법’에 반대한 인권운동단체들은 합심하야 ‘무지개행동’, ‘반차별공동행동’을 결성했고, 노회찬 대표발의로 새로운 안을 제출했으나 폐기됐다. 명백한 문제 상황을 법무부는 2010년에 와서야 차별금지법 제정을 검토하기 위해 특별분과위원회를 출범했으나, 2011년 1월 어이없게도 법무부는 이번 18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입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입장을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에 전달했다.(고 보수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투데이가 보도했단다.)


더욱 기가 찬 노릇은, 그간 정부는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는 것이다.(보라, 그들도 자신들이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2008년 유엔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검토제도, 2009년 유엔 사회권위위원회 한국 정보 보고서 검토 시에도 ‘차별금지법을 (제대로) 만들겠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 말이 무색한지고, 정부는 자기 말에 책임지는 그 어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노력도 보인 바가 없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 우리가 만들자


무능하고, 게으르고, 몰상식한 정부의 행태에 혀를 내두른 적이 한 두 번이었던가. 정부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올바른 차별금지법을 만들자’는 척박한 동토를 뚫고 나온 뜨거운 물줄기가 있었으니, 2010년 12월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발족한 것. 나처럼 여러 개의 명사들이 오밀조밀 모여서 새로운 합성명사를 이루면 살짝 머리 아파지는 언니들을 위해 불필요할지도 모를 설명을 덧붙이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올바른 법을 만들기 위해 여러 단체들이 한 데 모였단 말, 되시겠다. 2011년 1월에 발족 기자회견을 가진 이 따끈따끈한 연대체에는 현재 35개의 다양한 시민 사회 단위들과 뜻을 같이하는 개인들이 함께하고 있다.


이쯤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은? 그렇다. 모든 차별을 금지하면 당연히 좋긴 한데, 2007년에 삭제된 7개 조항을 넘기만 하면 차별을 막을 수 있다는 거냐, 올바른 차별금지법이라는 게 뭐냐, 라는 날카로운 질문이 등장할 타이밍이다. ‘모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법 조항들이 있어야 하는 걸까. 현재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함께 답하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법을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 으샤으샤, 들썩들썩 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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