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1)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 공기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손님 


자기 소개 시간이 싫은, 공기


 



 


 



2011년 아마 11월 수능이 있었던날 나는 당차게 대학입시 거부를 했었다. ‘투명가방끈’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그 당시 해당학년 93년생들 말고도 그 이후 대학을 들어갔다가 대학거부를 선택했던 사람들과 20대 초반에 사람들이 같이 대학거부를 했었다. 나 같은 경우는 대학에 들어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싶었던 게 아직 없었고, 그 높은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어쩌면 대학거부라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내가 대학에 가지 않았다는 선택의 이 꼴이 공부를 하지 않겠다 라거나 한국 사회 안에서 대학을 들어가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삶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외로움 혹은 배제의 싸움일수 있겠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하게 되고 그랬을 때 내가 들어갈만한 공동체라거나 사회가 부여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에 친구들은 어느 학교에 소속되어 어떤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있고 그런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 질문이 너무 자연스럽게 끊기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질문이라는 게 과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계급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까 같은.


 


나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학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그게 내 인생에서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일찌감치 원하든 원치않든 대학교에 들어가 나를 설명할 말을 부여받고 그대로 살아갔을테니까. 




그러나 그만큼 내가 대학거부를 선택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한다. ‘대학은 왜 안가신거예요?’ 사실 이쯤되면 쫌 양호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대부분에 사람들은 저러한 과정 없이 ‘몇 학번이세요?’ 혹은 ‘무슨 과/학교 다니세요?’라고 자연스럽게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들에 갈증을 느꼈을때 겪는 감정들이 있었다.




‘대학거부’를 했을 때 나는 같이 대학거부를 한 친구들에게 많은 위안을 느꼈고, 그건 나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생각은 아직도 변치않았고, 주변에 대학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젠 ‘불안함’도 덜 느끼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은 ‘이후의 삶’을 고민했을 때다. 대졸이라는 학력없이 내가 이 사회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갈증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투명가방끈이후에 대학입시거부 운동은 축소되었고 그때에 막연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다.




‘운동’의 일부로써 ‘선택’이라는 일부로써 시작한 운동이 이제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지지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느낄 때. 그때 절망감을 느꼈던 거 같다. 누군가는 왜 대학을 거부하냐고 이사회에서 불리한 선택을 왜 운동으로 개인의 몫으로 남겨지냐고 그냥 우리 같은 사람들도 대학을 선택할 수 있는 공공성이나 교육을 만들어달라고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냐고 했을 때 머릿속이 꽤나 복잡해졌었다. 아직까지도 대학에 갈 마음은 없지만 제일 큰 게 등록금문제이고, 배우고 싶은 과나 공부들이 없다는게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붙잡지만 여전히 ‘대학’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 고민거리가 될 것 같다.




이것을 나이로 연결시켜 보자면 아마 20대 중후반까지는 겪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자기소개를 할 때 학교나 학번 등을 얘기하지 않고도 상대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는 대화들을 원한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이 나이가 어린것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불리한 위치’가 되는게 아닌 관계들을 원한다. 상대방을 뭐 하는 사람인지 알기위해 자신의 학벌과 학번들이 꼭 필요할까? 물론 이 구분들은 그 사람을 기억하기 쉽게 하거나 같은 공동체 안에 소속원으로써 분류하기가 쉽기 때문에 쓴다는 것은 알지만 그런 분류들을 밖으로 가져와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학벌이나 나이많음이 개인의 사이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힘을 가지게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나를 표현하는 말들에 어떤 차별이 있는지 무엇을 양산하는지 경계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아직은 좀 어렵고 나도 헷갈리는 길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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