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두 번째 이야기손님
평범한 삶의 차이와 차별을 다시 묻는, 김광이 (상상행동 장애와 여성 마실)
평범하게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자각을 일찍 했던 듯하다. 그 시기는 초등학교 때 수술을 받기 위해 재활병원에서 수술과 보조기를 신고 걷는 훈련까지 마친 후에도 퇴원이 아닌 재활원으로 이동하면서 가족 내에서 나의 위치를 인식하면서부터 라고 기억된다. 평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는 내가 겪는 장애만이 아닌 빈곤과 어머니의 만성 질병,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책임감의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생각한 평범한 삶이란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보통 경험하는 삶의 진행과정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양부모님이 있는 가정 안에서 또래들과 어울리며 놀거나 학교에 다니는 생활. 모두가 대학에 가지는 못하더라도 고등학교라도 졸업한 후 취업을 하고 직장동료들과 일과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으로 나누며 성장하게 되는 ‘사회인’으로 사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인연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들처럼” 지지고 볶고 살면서도 그 남들에게서 빠지지 않는 대화 거리인 소재를 갖고 있는 삶이었다.
이러한 평범한 삶에서 어려서부터 빗겨나기 시작하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자의식은 깊어졌고, 부정적으로 형성되는 낮은 자의식은 칭찬받고 가능성이 보이는 나보다는 앞날이 막막하다는 초조감과 친구, 동료들과 어울리기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주변에서 늘 결핍되고 부족한 나만을 보이게 했다.
그럼에도 성장은 더디지만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저런 특성을 지닌 직장을 다녀봤고 다양한 인성을 지닌 사람들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한편 세상에 대한 부정과 노력의 충돌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평범하게 살기 위함” 보다는 남들과 다르더라도 가족의 짐이 되지 않고 자립생활 개념이 한국에 정착되기 전부터도 자급자족하며 사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되었다. 근저에는 가족에게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과 어린시절부터 겪어온 친척을 포함한 주변인들의 동정과 우려의 시선을 벗어나고픈 자존심이 작용했으리라.
재활원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선배들, 특히 장애여성들의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한 결혼이라는 선택과 삶의 모습은 그다지 잘 사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결혼 전부터 시가로부터의 모욕과 외면, 남성의 배반을 노심초사하거나 배반을 겪는 것보다는 자기 직업의 토대를 닦아나가는 언니들이 훨씬 잘 사는 듯이 보였다. 물론 주관적이고, 그 선택 또한 고통의 과정임을 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선배들의 후배들인 나의 장애여성 친구들은 많은 어려움들 속에서도 자존감을 지키며 자녀를 키우고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이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던 시대로부터 완전하게 동화 되지는 않았지만 그닥 낯설지만은 세태의 변화가 한축의 힘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운동을 시작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장애의 몸을 가능한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사람, 오히려 그래서 몸에 구애받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기 표현을 하며 산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살면서 남들 겪는 것은 해보아야 인간이 성숙해진다고 늘 들어왔던 핵심- 꼭 결혼을 하리라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고, 더 나이들어 옆에 있어 줄 사람이 없어서 가끔 외롭다는 생각에 젖기도 하지만 장애여성임을 드러내고 사회변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지금의 내 삶이 낫다고 자부한다. ‘고독이라는 정서는 누구나가 느끼는 평범한 것’이고 완전한 삶은 없지 않은가.
“평범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수신확인-차별이 내게 왔다>이 계기가 되었다.
때로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에게 가족이나 주변은 “평범한 것도 모자라…” 어떠한 행동을 한다고 비난을 하곤 한다. “남들처럼 살아라”란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무거운 억압이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이해할 기회마저 박탈한다. 평범한 삶을 희구하는 것은 ‘정상화’의 또다른 말이 아닌가 싶다. 운동을 시작한 이후 이미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 정체성은 단순히 장애인, 성소수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놓인 환경에서 정체성은 각자가 수용한 의미로 형성된다. 이들이 특별해보이지 않게 된 것은 다양한 삶의 형태와 가치관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인 듯하다.
평범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성애, 결혼, 비장애- ‘장애’를 일상 사회활동에서 겪는 장벽으로 해석할 때, 엄밀하게 장애를 겪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장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리라-, 안정된 직장에서 적당히 돈을 벌어 안정되게 사는 것 등이 평범한 것일까.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는 것은 차별적 시선, 편견, 법과 제도에서 차별받지 않고 싶지 않다는 희구라면, 평범함의 기준은 권력의 시각이라는 역설이고 반증일 것이다.
동성애, 비혼, 다양한 가족 형태, 확장되어가는 장애의 유형, 불안정 노동자들이 모두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 평범함의 범위는 점점 좁아들고 있다. 이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일상에서 만나기에 차라리 비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더 많고 이들의 고뇌에도 익숙해졌다. 익숙해지면 평범해진다. 평범함의 틀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수단으로 신분제와 차별이 당연히 여겨졌던 근대로 돌아가는 징표는 아닌지 생각해 볼일이다. 그래서 “난 평범하게 살지 않을 거야.”라는 말이 치기이든 야망이든 희망이든 신선하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평범이라는 말은 양가성을 지니고 있어 참으로 얄궂다. 이제는 차별이 정당화되는 “평범”에 대해 또하나의 의식을 치루었으면 한다. 비평범함을 평범하게 인식되도록 만들자고 하고 싶다. 개개인의 삶의 과정과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내게도 아직 필요하다.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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