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UP] 2023-7월호 | 평등, 삶의 현장! : 고속도로 위 평등의 길을 낸 톨게이트 노조, 여성노동자들

 

[평등UP] 2023-7월호 | 평등, 삶의 현장! : 고속도로 위 평등의 길을 낸 톨게이트 노조, 여성노동자들 

 

평등, 삶의 현장! 차별에 맞서 크고 작은 승리의 경험들, 차별의 현장들을 드러내며 지금도 차별에 맞서 분투 중인 현장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생생한 이야기들 많이 기대해주세요!

 

달리는 고속도로 위,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싸우고 있다.

 

지난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가이드라인은 자회사라는 편법으로 비정규직화를 강화시켰다. 2019년 한국도로공사(아래 도로공사)는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 직접고용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도로공사는 조합원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2019년 7월 1일 자회사를 설립하고, 자회사 전환을 거부한 1,500명을 집단해고 했다. 2019년 8월 29일 대법원이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은 도로공사의 정규직이며 소송 당사자가 아니라도 직접고용 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도로공사는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며 나머지 조합원들도 개별적으로 법적 판단을 받아 오라고 버텼다.

 

전국의 영업소에서 일하던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대량해고에 맞서 싸우기 위해 모였다. 서울 톨게이트 캐노피에서부터 한국도로공사 본사, 청와대, 전국 곳곳의 도로위까지 안 가본 곳 없이 싸웠던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연일 뜨거웠고 217일의 투쟁 끝에 직접고용을 쟁취해냈다. 그러나 이들의 출근은 또다른 싸움의 시작이었다. 대법원 판결로 직접고용 의무가 있는 도로공사는 복귀한 노동자들을 요금수납 업무가 아닌 임시로 만든 졸음쉼터를 중심으로 관리하는 현장지원업무에 일방적으로 배정하였다.

 

현장지원직이라는 직군으로 일하게된 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뜨겁게 싸웠고 싸우면서 더욱 단단해진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 이야기를 박순향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톨게이트 지부장과 도명화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인터뷰어 : 기선, 지오, 진희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전략조직팀)

 

 

일터에서 노동자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 내가 싸우는 이유

 

 

사진1. 박순향과 도명화가 총회 및 이취임식에서

한복에 초록색 노동조합 조끼를 차려 입고 나란히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박순향 : 2013년에 입사를 했어요. 다음 해인 14년에 노조가 만들어졌고요. 입사를 10월에 했는데 회사 꼬라지가 웃긴 거예요. 왜냐면 사무장이라는 사장 밑에 있는 높은 사람이 사람들을 구별해. ‘이 사람하고만 어울려라’ 저한테 얘기해요. 어울리라는 사람중에 도명화도 있었어요. 어울리지 말라고 한 사람들 나중엔 다같이 투쟁했잖아.

 

내가 한 달 동안 지켜본 회사 꼬라지는 높은 사람에게 줄을 서야 회사를 오래 다니는 구나. 내가 본 도명화는 일은 잘 해. 그리고 지적질도 잘하는 좀 재수 없는 인간. 잘난 척하는 인간(웃음). 도명화는 주임도 하고 회사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지. 내가 원하는 사람들의 방향은 회사가 싫어하는 스타일의 언니들이었어요. 그래서 회사가 나에게 관계 못 맺게 가림막을 쳐놓는 거에요. 그런데 그 언니들이 어느 날 노동조합을 만든대요. 그래서 모른 척 해 줬어.

 

어느 날 식당 가서 보니 막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고 있더라고요. 그날 노조 가입서를 받을 거래. 며칠 전부터 신입사원인 내게 사무장의 전화가 계속 오는 거야. ‘네가 노동조합 가입을 안 하면 주임을 시켜주겠다’고 해요. 그래서 난 주임 하기 싫다. 차로에서 돈 받는 것도 맨날 틀려서 난리를 치고 있는데 왜 주임 시키냐? 자꾸 나한테 건드리지 마라. 식당에서 막 팔뚝질 하고 있길래 쉬는 시간에 내가 그거 가입서 달라고 해서 썼어요. 쭈뼛쭈뼛 하는 언니들한테도 갖다 줬어요. 회사가 나쁜 건 알았고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 모든 사람이 같이 가입을 해야 회사가 뭐라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도명화 : 2004년도에 입사했어요. 처음에 들어갔을 때 그때 내가 제일 어렸거든요. 그때 내가 30대 초중반이었을 것 같아요. 내가 제일 막내였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이런 회사가 다 있어? (그러면서도) 10년 더 다녔죠. 그러니까 이거 처음에 이상하다 생각했어. 언니들한테 ‘언니 이거 아니잖아요?’ 처음에는 이상할 때 마다 왜라고 묻거나 따졌죠. 그래서 할 말 다하고 살아서 좋겠다고 언니들이 말했어요. 이게 다 하는 걸로 보이면……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 타성에 젖는 거예요. 저 역시 그랬죠.

 

박순향 : 회사랑 싸우는 그 와중에도 (도명화를 가리키며) 일은 일이래. 잘리고 나서 정신 차린 거지. 내가 잘리고 났는데 일이 뭐 필요해?

 

도명화 : 내가 나올 당시에 12년차로 제일 오래 다닌 사람이었거든. 근데 그때 가졌던 마인드가 엄청 사용자 마인드였어. (내가 생각해도) 지금까지 재수 없게 느껴져.

 

박순향 : 고속도로에서 일할 때 차가 막 몇 백 대가 신입한테 달려와. 이 차가 뭔지 얼마를 받았는지 막 머리가 깨져 나가고요. 정산 틀렸다고 집에 가 있는 사람한테 전화해서 ‘너 그거 틀렸는데 너 아니?’ 지금 생각하면 갑질이죠. 또 당시에는 회사에서 근무 시간에 핸드폰 하면 안 된다고 핸드폰 놓고 들어가라고 했어요.

 

도명화 :휴대폰을 보관하라고 해. 학생인권 문제로 학교에서도 안 한다 하는데 핸드폰을 다 통에 집어넣는데 더 웃기는 건 제출했나 그걸 확인을 해요.

 

박순향 : 집에서 급한 연락 올 수도 있고 애를 키우니까 올수도 있는데 전화기가 없으니 회사로 전화해.

진희 : 그렇게 전화 오면 사생활이 노출 되는데 집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회사가 알고요.

 

박순향 : 노동조합 만드니까 이제 그런 거 다 정리됐죠. 그리고 고객이 오면 무조건 ‘죄송합니다’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이제 없어진 거죠. 회사에서 고객하고 문제가 터졌는데 고객이 뺨을 때려도 우리가 사과하라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이게 회사야!!! 진짜 끔찍해.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진짜 멱살잡고 싸웠어.

 

싸움을 기억하는 몸, 곁을 지키는 동료들
“그때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흩어지지 않았어요”

 

기선 : 그렇게 노동조합으로 싸우고 난 후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생겼을텐데요. 할 말 다해서 좋겠다던 사람들이 지금의 그 당당한 모습, 일터에서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되는 과정이 궁금해요.

 

도명화 : 빠른 시간은 아니에요. 사실은 큰 소리를 내는 게 얘(박순향)밖에 없었거든요. 그때 난 이제 해고됐을 때라 회사에서 얘만 싫어하는 거죠. 조합원들한테 얘기했어요. 순향이 혼자 고함 지르게 만들지 마라. 회사에서 뭘 하나 보고. 무조건 한 목소리로 같이 얘기해야 한다.

 

박순향 : 우리가 투쟁하고 복귀를 하니까 회사가 저를 되게 많이 공격했어요. 고소도 하고 경찰서 맨날 가고. 이제 뭐만 잘못하면 징계한다고 경고장 날아오고. 그런 상황을 계속하다가 우리가 회의를 무조건 같이 해야 한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를 잡았어요.

 

도명화: 이런 경험 속에서 예전 같으면 입 다물고 했을 일인데. 이젠 왜 해야 해요?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더라고요. 이미 우리는 투쟁을 했고 해고자 복직을 못 했어요. 진짜 모든 걸 다 경험을 했어. 다 전국을 돌면서 회사의 갈라치기에 지부장이 배신도 했고 그 후 안되겠다 싶어서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 소속으로 바꾸기도 했고. 하지만 우리는 흩어지지 않았어요.

 

 

사진2. 도명화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사진3. 박순향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톨게이트 지부장

 

 

박순향 : 우리가 노동조합을 현장에서 배웠잖아요. 처음엔 한국노총에 뛰어들어서 소리 지르는 것만 하고 있다가 해고된 거죠. 현장에서 그냥 으쌰으쌰를 배운 거예요. 그러면서 기본적인 룰도 모르고. 다수결로 6명 반대, 7명 찬성 그러면 오케이 이렇게 배웠단 말이에요. 우리끼리 했으니까. 이게 잘못된 거라는 걸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 나부터 잘못했었다고. 해고되면서는 노조 활동을 우리가 좀 할 테니 (다른 조합원은) 좀 쉬면서 같이 해라 하면서 한 달에 한 번 하는 회의, 교육, 이런 건 열심히 같이 하자고 시작했죠.

 

박순향 : 한국도로공사 47년 역사상 첫 번째 파업이었던 2015년 서산지부 파업투쟁을 통해 배웠어요. (이명박 정권은 공공기관 경영 효율화로 도로공사 소속 톨게이트 영업소 전체를 외주화하여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이때 서산톨게이트 위탁업무를 하던 외주업체는 새로운 수의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도명화를 비롯한 3인에 고용승계와 단체 교섭을 거부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다가 부당해고 항의하고 파업까지 가면서 충남 인권센터에 도움을 받았어요. 민주노총인지도 몰랐는데 파업하면 천막 쳐야 하는 줄 알고 쳤어. 천막이랑 음향까지 빌려서 첨엔 노래 하나 틀어놓고 부르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버스타고 조끼 입고 와서 같이 연대하고 그때 이후에 1500명 투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그때 배웠어요.

 

2015년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한 후에 이 소식을 다 같이 알리자고 전국순회를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온다는 걸 알고 회사에서 문 걸어 잠그고 창문을 다 닫아요. 우리 마이크 소리 들릴까 봐. 그럼 우리 막 가서 현관문 열고 수납원한테 우리가 만든 전단지를 주면 사장이 뺏어. 당신이 왜 뺏어가냐고 내가 당신 줬냐고 수납원 줬지.

 

도명화 : 사장들이 도로공사 있을 때 안 그런 사람도 똑같아져. (외주화한 영업소에는 도로공사의 퇴직자들이 사장직에 배치된다.) 지나다 보면서 계속 그렇게 되는 구조에 있어. 나중에 이제 그 사장이 면담 끝나고 얘기 좀 하자는 거야. 자기 엄청 서운하다는 거야. 자기가 그 톨게이트 있을 때 제일 잘해준 우리 둘이 어떻게 둘이 마이크를 잡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냐고. 그래서 그때 우리가 ‘아니다’ 라고 했어요. 지금 여기 지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그런 거였지.

 

박순향 : 너 다음 계약 때 보자. 다음 회사 올 때 보자. 다음 계약 때 보자. 그게 맨날 협박이 똑같아요. 일단 그걸로 흔들리니까 그거예요. 그게 무기야.

 

도명화 : 도로공사 영업 실무 편람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에 외주사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내용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외주사 정규직은 보통 5년 계약을 하고 오니까 5년 동안은 해고할 수 없다 정규직이라는 뜻인데 어느 날 문구 자체가 없어졌어요. 내가 12년을 다니면서 서산 한 군데에만 다녔거든요. 그래서 회사가 바뀌는 거에 대해서 내가 이 자리 지키고 있기 때문에 여기 내 직장이라고 생각했지. 나는 여기 있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이제 시끄러워지고 보니까 6개월에 한번씩 근로계약서 쓰고 막 그러더라고요.

 

노동자끼리 편 나누기를 하고 연차도 제대로 못 쓰게 해요. 주차 수당도 없고 연차 수당은 임금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아요. 연차 수당은 딴 경비에서 돈을 줘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차 쓰기 싫어도 무조건 쓰라고 해요. 그래서 저도 법을 처음으로 알아본 거에요.

 

박순향 : 나가라고 하면 당연히 나가야 하는 줄 알고 살아왔잖아요. 법도 몰랐고 노동조합 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노동조합 한다는 자체가 용기였고 노동조합 한다는 거는 잘릴 각오 하고 가는 거거든요. 어차피 잘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게 없었던 거고 잘릴 각오를 안 하고 한 사람들은 이거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거죠. 살아 남아야 하니까. 근데 이제 됐어. 이제 나는 나는 끝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무서울 게 없는 거예요.

 

도명화 : 괴로울 뿐이지

 

지오 : 그럼 뭐가 무서우세요?

 

박순향 : 내가 무섭지. 왜냐하면 내가 가끔 이제 기복이 있어서.

 

도명화 : 뭐가 무섭지. 나도 있을 건데… 나는 그 해고되더라도 복직 투쟁을 할 거예요. 다시 들어가서 나오더라도 나 진짜 내 손으로 사표를 쓰고 나오고 싶어. 그랬었죠.

 

박순향 : 해고자 그에 대한 미안함이 되게 컸어요. 원래 지랄은 내가 더 많이 했는데 버릇은 내가 더 많이 없었는데 그런 미안함이 컸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복직을 시켜야겠다.

 

도명화 : 4년 만에 복직했어.

 

박순향 : 한 달이 되든 두 달이 되든 복직하고. 다시 잘려도 그거는 도로공사에 잘리는 거니까 이건 의미가 다르다. 같이 잘리자고. 두 달밖에 안 되는 걸 복직을 하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무조건 해야 한다. 나의 복직의 조건은 그거였어요. 간접 고용에서는 고용승계를 안 하면 계약해지 하고 재계약이라고 해요. 그런데 너희는 날 해고한 것이라서 복직 시키는 거다. 해고복직으로 써라. 그리고 당사자한테 사과해라.

 

도명화 : 사무실에 있던 조합원들이 다 쫓겨나서 밖에서 근무하다가 내가 복직하면서 다 안으로 들어갔어요. 복직하고 출근하고 너무 좋았어요. 그때 너무 좋았어. 근데 출근할 시간이 없었다 뿐이지. 진짜 출근하는 날은 너무 좋았어요.

 

 

 

사진4. 치열했던 투쟁의 기억을 떠올리는 대화하는 도명화, 박순향

 

 

 

사진5. 인터뷰 시작 시 캐노피 투쟁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받친 두 사람

 

 

외주화 반대 투쟁, 평등한 노동자의 권리

 

기선 : 이제 정규직 전환을 자회사로 한다고 했었을 때. 끝까지 반대하고 다 같이 투쟁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어떤 이야기들 때문이었어요?

 

도명화 : 자회사가 어차피 용역회사의 구조랑 똑같다는 거를 우리는 이미 알았단 말이야. 정년도 연장되고 월급도 더 준다고 하는데 난 이상한 거야. 왜 우리한테 저래 잘해주지? 그래서 더 알아봤던 거에요.

 

박순향 : 도로공사가 하라는 거 반대로 하면 된다고 항상 조합원들한테 얘기했어요. 우리 편은 도로공사가 아니다. 우리 편은 우리다. 자회사 직접 고용 선택할 때 한 퇴직 5년 정도 남으신 분들한테는 자회사 가도 된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투쟁이 힘든 길이니까. 직접 고용은 직접 고용이 안정되려면 4~5년은 걸린다. 근데 자회사가 만약에 없어진다 해도 4~5년은 걸린다. 그러니까 언니들 힘드시면 자회사 가도 된다. 퇴직 6개월 1년 남으신 분들이 직접 고용 간다고 와서 우리보다 더 고생했어요. 내가 1년 몇 년 더 하겠다고 그 꼴은 안 한다.

 

도명화 : 자기 1년을 위해서 나머지 사람 10년을 버릴 수 없다고. 1심에서 임의대로 만든 현장 지원직이나 임금 체계는 다 무효다. 없어져야 한다. 판결이 났어요. 그러면 결론적으로 말하면 걔들이 이제 거기에는 임금 체불이니까 이제 임금이 들어가잖아요. 엄청나게 판결이 잘 났어요. 도로공사가 이 판결만 받아들여진다면 사실 업무에 대한 고민도 좀 풀어놓을 수 있거든.

 

박순향 : 이제 우리는 행동을 보여줘야죠. 2심 가고 대법 가고 갈 때까지 더 하자고! 턱 괴고 있으면 안 되죠.

 

현장지원직 하려고 이력서 놓고 면접 보고 들어온 사람 여기 아무도 없다. 지금 하고 있는데 그거에 대해서 떳떳해라. 회사가 시키는 거지 우리가 하겠다고 한 사람 없고 지금 하고 있는 거에 대해서 자괴감 느낄 필요 없다. 그런데 또 우리 없어지면 외주화 시킨대요. 우리를 좀비라고 하거든요. 회사에서는 좀비들 없어지면 외주화시킨대요.

 

도명화 : 정규직 전환으로 직접고용 되거나 공무직 사람들은 더 이상 충원을 안 하잖아요. 이제 빈자리가 나면 공무직으로 넣어야 하는데 기간제로 넣는 거죠.

 

박순향 : 6개월짜리는 노동자 아니야?

 

도명화 : 자회사도 되게 규율이 강해졌어요. 이게 이제 하나의 회사가 되면서 엄청난 되게 힘들어하고. 우리 보고 맨날 겁 줬던 게 너네 직접 고용 가면 멀리 발령 보낸다고.

 

일터에서 차별을 발견하고 주저없이 행동하는 힘

 

도명화 : 도로공사 사장이 지사를 돌면서 갑자기 환경 정비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청소, 불뽑기 같은 안 하던 일을 막 시키는 거야. 사장이 온다고 하면 피켓 시위를 못할망정 청소할 생각을 하냐고 내가 막 뭐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날 순향이가 현관에서 혼자 서서 1인 시위를 한 거야.

 

우리가 도서 포인트 차별이 있어요. 기존에 있던 정규직은 책 사보라고 30만 포인트를 받아요. 나 (책)죽어도 안봐. 그래도 기분 나빠. 근데 우리가 들어가던 해에 정규직이 20만 포인트가 되고 우리한테 10만 포인트를 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야 이거 주려면 다 주고 안 주려면 말지 그랬더니 재정이 안 된대. 그래서 재정이 안 되면 그럼 15만 포인트를 줘야 하는 거 아니냐니까 계속 늘려 가겠대. 그런데 그 다음에 정규직은 30만 원 원상 복구되고 우리는 10만 만원이야. 그래서 이거 말도 안 된다고. 돈 없으면서 아무도 주지 마라. 이런 게 차별이다!

 

도로공사 들어와서 천대받고 하지만 우리가 그 분위기를 되게 많이 바꿨거든. 정규직도 대놓고 고마워 못하지만 고마워해요. 그러니까 병가 같은 거. 아프면 막 쓸 수 있는 거. 우리가 쓰고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젊은 현장직에서도 젊은 세대들은 이제 불만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도 (노조를) 싫어해. (그래도) 그런 분위기를 많이 바꿨다고 생각해요.

 


사진6. 한국도로공사 사장이 천안지사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도서포인트 차별을 문제제기하는 피켓을 만들어 1인 시위중인 박순향 지부장.

피켓엔 “임금체불 판결났다. 호봉표 지금당장 판결대로!

현장지원직 도서포인트 차별 사장님은 알고 계십니까”라고 적혀있다. 

 

 

박순향 : 요즘엔 조합원들이 어쩔 때 보면 진짜 먼저 해결하고 결의해요. 진짜 이게 되게 중요해요.

 

도명화 : 저는 진짜 감동적이었던 게 직접 고용된 것보다 더 좋았던 게 구미 지사에 우리 조합원 딱 한 명이 있었거든요. 딱 한 명이 있는데 병가를 안 해 준 거예요. 집이 용인인데 구미까지 출근하라고 명령을 한 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 출근 안 했더니 무단 결근 처리를 했나. 그래서 내가 지사장을 만나러 갔어요. 근데 이 지사장이 ‘다음부터 잘할게. 되돌릴 수는 없어’ 이러는 거에요.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되돌리려고 왔지. 그러면 알겠다. 투쟁을 했는데 조합원들이 자기 연차 쓰고 맨날 왔어요. 전국에서 자기 연차 쓰면서 자기 돈 들여서 조 짜서 오고.

 

기선 : 지난 태풍 힌남노때 톨게이트 수납업무를 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국가인권위에 진정했던 사건도 있었잖아요. 태풍이 오는데 차도 도로에 없는 그 부스를 지키라고

 

도명화 : 그 뿐만이 아니에요. 태풍 곤파스인가 왔을 때 다 부서졌거든. 그때 야간 근무했는데 나가 있는 것도 무서운데 다 앉아 있으라고 하고. 그거는 들어오라고 안 해요. 앉아 있으라고 해요. 그건 태풍 온다고 캐노피에 현수막 걷으라고.

 

박순향 : 우리한테 시켰어요. 투쟁할때 점거했던 캐노피 위에 올라가라고 한다니까 .

 

도명화 : 태풍 오는데 현수막 잡으면 사람이 날아갈 거 같은데 올라가라고 한다니까

 

박순향 : 그러니 캐노피 점거야 우습지.

 

노동조합 안의 차이를 마주하며 동료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그리고 더 넓은 평등을 위한 연대

 

기선 : 남들은 힘들다는 3교대 근무를 언니들은 그 점이 좋았다고 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복귀 후 정규직 근무하면서 다시 3교대는 못하겠다고 하시던 이야기를 들었어요.

 

박순향 : 우리가 애들을 다 키워 놓은 연배가 됐어요. 옛날에 우리가 수납원을 되게 오래 다녔잖아요. 근데 지금은 돌볼 애들이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굳이 내가 이렇게 빡빡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도명화 : 빨간 날 쉬고 낮에 일하는 게 여태까지 우리가 몰랐던 거잖아요.

 

박순향 : 나는 3교대가 너무 힘들었어요. 근데 어쩔 수 없이 그거를 선택했어요. 왜냐하면 내 생활도 해야 하고 애들도 케어해야 하고. 왜냐하면 시간에 묶여버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그때는 3교대를 선택했어요.

 

도명화 : 과적 차량이 욕 하면서 막 때리려고 하고 그러거든요. 과적 걸리면 고발장을 내가 쓰거든요. 그러면 야간에 사실 나 혼자 있는데 그 무서운 아저씨들이 들어와. 어떨 때는 한 명 들어올 때도 두세 명 들어올 때도 있거든요. 고발장 쓰는 자체가 짜증 나는데 거기서 뭐 좀 틀어지잖아요. 난리 나요. 그래서 우리 막 가스총도 있는데 가스층 쏠 시간이 어디 있나. 막 난리 나. 근데 그런 사람 원체 많이 봐 가지고 그런 겁은 없었던 거야. 그리고 명절 때는 금고 돈 털러도 오거든요.

 

진희 : 노조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그 한부모 가정이라든가 북한 이탈 주민이라든가 여러 정체성을 가지신 분들 같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장애가 있는 분도 있고. 같이 노조 활동하거나 일하실때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긴장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있으셨는지

 

도명화 : 장애인 노동자가 많아요. 영업소의 반이 장애인일 때도 있고. 전라도는 거의 100%를 장애인으로 써요. 함께 일하는 게 불편하다 이런 건 없어요. 원체 같이 생활했던 분들이라서. 장애가 심하신 분들도 많거든요. 근데 앉아서 활동하는 사람인데 진짜 거의 모든 일을 다 했어. 도로공사가 우리를 직접 고용했을 때도 장애인에 대한 어떠한 고민도 없었던 거예요. 일 자체에 그 고민을 하나도 안 한 거예요. 시설 같은 것도 노조가 가서 다 얘기하고 바꿨거든요. 시설이라든지 이분들이 나가서 일을 할 수 없으니까. 이제 본인이 동의 하에 하는 업무를 만들어라(요구했죠)

 

박순향 : 투쟁하면서 우리 조합원들을 본 거지. 아래쪽에서 많이 올라오시는 거 보고. 근데 또 장애인이 아닌 것 같은데 장애인인 경우도 있고.

 

도명화 : 우리가 오신 분들에게 막 수박을 나눠줬거든요. 이제 쟁반을 이래 들고 이 수박을 나눠줬는데 조합원 A씨가 나이도 젊은데 서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이것 좀 안 하냐고 뭐라고 했지. 그러니까 쟁반을 드는데 불편해 보이는 거야. 손에 장애가 있었어. 그렇다고 야 거기서 미안해. 하지 마. 이건 또 안 되잖아요. 모르는 척 하고 그냥 계속 하게 놔뒀어. 우리가 투쟁하며 혹시나 실수할까 봐, 우리가 했던 투쟁영상을 보기도 해요.

 

평등하게 살기 위한 투쟁
“언제든 우리가 끝낼 수 있다는 거 그렇지만 끝내지 않는다는 거”

 

 

사진7.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톨게이트 지부 상반기 조합원교육 전체 사진.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밝게 웃으며 깃발을 펼치고 있다.

깃발 가운데 박순향 지부장이 누워 밝게 손을 흔든다.

 

 

 

사진8.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톨게이트 지부 2023년 총회 사진

 

 

박순향 : 모든 투쟁이 언제 끝나냐고 물어볼때가 되게 난감하거든요. 언제 끝나요? 조합원들은 대답을 기다리잖아요. 나는 오늘도 끝낼 수 있다고 얘기했어요. 오늘 끝내 드릴까요? 라고 했어요. 

 

근데 오늘만 더 해봅시다. 그리고 내일만 더 해봅시다. 내일까지 더 해봅시다. 이랗게 얘기를 했거든요.  모든 건 그래요. 우리가 끝낼 수 있다는 거. 그렇지만 끝내지 않는다는 거. 그게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언제든지 끝낼 수 있지만 끝내지 않는 거잖아요.

 

도명화 : 저는 되게 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편이에요. 맨날 내 보고 뭘 몰라서 저런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까를 난 많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 저는 투쟁할 때도 그랬고 생각한 대로 다 됐거든요. 근데 이게 시간의 문제인 거죠. 결국 안 되는 건 없는데 생각의 차이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구나. 그런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내가 투쟁하거나 시작하는 일은 다 잘 될 것 같거든요. 그 기억과 마음이 계속 이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맨날 저한테 말도 안 되는 저 자신감. 긍정적인 마인드가 아주 불만이라고 해요. 근데 저는 옛날에 조합원 12명이었을 때 농담삼아서 조합원 300명 되면 순향아 내가 막 민주 연합 중앙 가서 큰소리 치고 그럴 것 같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했는데 지금은 2년만에 됐어요. 400명까지 조직했었거든요. 그리고 “나 도로공사 들어갈 것 같아”라고 했을 때 다 안 된다고 했거든요. 근데 진짜 들어갔어요. 그니까 순향아, 넌 나만 믿어.

 

박순향 : 지금도 언제든지 싸움은 할 수 있고 언제든지 싸움은 끝낼 수 있어요.

 

진희 : 우리가 끝내야 끝내는 거다?

 

도명화 : 난 진짜 다 잘 될 거 같아.

 

기선 : 어떻게 계속 유지가 돼요?

 

박순향 : 지금까지 온 게 성격이 달라서 같이 올 수 있었어요. 둘이 같이 불 같거나 둘이 같이 이렇게 낙천적이거나 했으면 같이 못 왔을 수도 있어요.

 

지오 : 궁금하긴 했어요. 맨 처음에 어쨌든 울었던 얘기부터 시작해서 이 얘기를 쭉 했었기 때문에.

 

박순향 : 엄청 친한 줄 알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사람과 내가 만나는 친한 케미는 아니었어요. 하다 보니까.

 

도명화 : 우린 투쟁 딱 시작하고 친해졌어요. 투쟁 시작 했을 때 엄청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 때 얘가 하는 거 보고 쟤는 정말 진심이구나 느꼈어요. 

 

더 많은 무지개로 차별의 질주를 멈추기

 

 

사진9. 인터뷰를 마치고 ‘차별금지법 제정하라’가 쓰여진 깃발을 들고
투쟁을 외치는 톨게이트 노조의 박순향, 도명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지오, 진희

 

 

기선 : 노조의 운동이  평등으로 묶여 있는 때가 되는 거잖아. 차제연이 그런 운동을 한다면 우리 톨게이트 싸움 할 때 어떤 부분을 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거 있어요?  우리 조합원들과 이러이러한 얘기를 할 때 같이 해볼 수 있을지, 아니면 뭔가 우리를 믿는다고 한다면 이런 것들이 있다면.

 

도명화 : 내부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건 있어요. 근데 사실 조합원들이 투쟁하고 들어와서 우리가 교육할 수 있는 게 1년에 두 번이 있거든요. 공식적으로 지원 받아서 할 수 있는 교육을 정말 잘 활용하고 싶어요. 우리 조합원들이 눈을 뜬 건 이 세상이 조용한 세상만은 아니구나에 눈을 뜬 거예요. 나처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투쟁할 곳이 너무나 많구나. 거기에 연대를 하는 게 맞다고 하는데 연대의 폭을 넓히기가 또 쉽지 않아요. 아직은 딱 노동. 그래서 저는 우리 지부장한테도 맨날 얘기하는 게  평등 교육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때론 우리 조합원들도 보면 노동 활동가나 다른 활동가 앞에서 이렇게 실수하는 부분이 있어요. 어떤 악의를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닌데 몰라서 하는 실수도 있고요. 평등 교육이든 성평등 교육이든 그런 걸로 한 꼭지를 넣고 싶어요. 노동조합 중앙에선 우리 지부가 성평등 관련 얘기하니까 ‘톨게이트 지부도 조심해야겠다’ 는 거에요. 여성조합원이 많은 게 우리 조직인데 이런 말 기분 되게 나쁘거든요. 

 

박순향 : 당황스러웠던 일이 있는데 (민주노총에서 만든) 가방에 무지개 로고 있는 거를 줬었는데 이거 성소수자 그거잖아 하면서 무지개를 까만색으로 칠하기도 하는 거에요. 심각하구나.

 

도명화 : 노동조합 하면서 변하고 있다고 느끼는 건 이제 내가 있다는 걸 의식해. ‘절대 그런 얘기 아니에요. 절대 이상하게 듣지 마세요’ 그런데 내가 말을 하지 마라. 그렇게 신경 쓰이면. 저 처음에 노동조합 들어왔을 때  간부들이 우리 앞에서 음담패설을 했었거든요. 내가 듣기 너무 거북했는데. 지금은 우리 앞에서 그런 말 절대 못해요. 그때는 불편해서 듣기도 싫었고 그러다가 이제 관심이 좀 있었어요. 공부를 하면서 그 불편함이 왜 불편했는지를 안 거지. 근데 말을 못 하겠는 거예요. 좋은 관계에서 내가 여기서 이러면 관계가 나빠질까. 사실 그게 되게 좀 신경 쓰였는데. 근데 그게 꼭 정색하면서 말을 안 하더라도 웃으면서 큰일납니다 말하고. 어쨌든 그거를 불편하다가 아니라 우리는 필요한 긴장이라고 얘기하고. 긴장할 필요가 있고. 지회가 자랑하는 커다란 레인보우 깃발이 있는데 벽면 한 면에 지회 깃발 걸어놓고 옆에 레인보우 같이 걸었어요. 그곳이 좋아하는 포토존이에요.

 

 

외주화 반대, 직접 고용 쟁취! 라는 구호 뒤에는 사람답게 일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고 존엄을 지키면서 일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시작된 투쟁은 한국사회 노동의 문제를 낱낱이 파헤치는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그 힘은 ‘흩어지지 않고’ 서로 곁이 되어 싸웠기에 가능했다. 톨게이트는 장애인, 탈북민, 여성 등 다양한 소수자들이 함께 일하는 현장이었고 때문에 평등을 쟁취하는 싸움을 하지만 이미 평등은 톨게이트 노조의 투쟁 한 가운데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동료로 서로의 곁이 되어주고 싶은 여성 노동자들의 절실함은 흩어지지 않는 그러나 여러 색을 담은 힘을 만들어냈다. 

 

정부와 기업들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편법을 동원하여 외주화를 추진한다.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는 정부가 나서 노동 혐오를 조장하는 동시에 노동의 전 영역에 걸쳐 개악을 시도한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노동을 향해 맹렬히 달려나가는 차별의 고속도로를 멈추기 위해 평등과 안전, 존엄을 외치는 노동자들의 투쟁 또한 나날이 거세지고 있다.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구호 뒤에 숨겨져 있던 긴 차별의 경험과 이를 부수기 위해 용기내었던 겹겹의 시간들이 쌓여있음을 알려주었다. 그 시간 속에서 서로를 지켜내고자 한 마음들은 굳이 평등이라 이름붙이지 않아도 감각할 수 있는 힘이었다. 도명화, 박순향의 말대로 싸움을 경험한 몸은 이제 과거의 나와는 다르다. 바로 그 힘, 싸우고 있는 몸들의 연대가 지금의 반노동 시대를 헤쳐나갈 작은 빛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