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차별이 사라질까요?
- 여러 개혁 과제도 많은데 왜 지금 당장인가요?
- 개별법이 있는데 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따로 필요한가요?
- 성소수자 차별금지까지는 시기상조 아닌가요?
- 국가인권위원회법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 차별금지법은 결국 소수자를 배려하기 위한 법 아닌가요?
- 차별금지법 제정되면 마음대로 말도 못하게 되나요?
- 혐오선동세력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나요?
그럴리가요. 하지만 차별금지법도 없이 차별을 없앨 수 있을까요?
차별은 뿌리가 깊습니다. 누군가의 편견이나 악의, 몇 가지 잘못된 제도로만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에는 예방과 교육 등 여러 노력이 필요합니다. B형간염 바이러스가 음식을 같이 먹거나 집단생활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 전염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에는 오랜 차별이 있었습니다. 2000년까지 전염병예방법에서 ‘일시적 취업제한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제도적인 차별은 없을지 모르 지만 기숙사 입사를 거부당한다거나 스스로 위축된다거나 하는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법의 제개정이나 특정한 조치로 차별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편견에서 기인한 왜곡된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올바른 정보들을 알려나갈 필요도 있고 익숙해진 관행과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훈련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만으로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명백한 차별에 대해서는 시정하거나 금지하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차별금지법만으로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차별금지법도 없이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는 ‘차별을 알아차리기’ 위한 법으로서 차별금지법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차별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엇이 차별인지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토론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엇이 차별인지, 금지되어야 할 차별행위는 어떤 것인지, 차별을 없애가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할지 등은 정 답이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차별금지법은 이와 같은 질문에 사회가 함께 답을 찾아가는 길을 여는 법입니다.
‘차별금지법 지금 당장’을 외치다보면 더 시급한 국정과제들이 먼저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급함’은 누구의 기준일까요? 차별은 하루 하루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30세를 넘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사면접에서 탈락할 때,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보험가입을 거부당할 때, 성소수자들의 행사라는 이유로 체육관 대관이 취소될 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목욕탕 출입을 거부당할 때, 이 모든 차별의 순간들이 우리의 매일입니다. 차별금지법이 ‘나중에’ 제정되도록 미루어도 괜찮다는 것은, 오늘의 차별은 일어나도 되는 일이며 ‘나중’이 올 때까지 참아도 괜찮은 일이라는 의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외치는 구호처럼, 평등한 세상에 나중은 없습니다.
또한 ‘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먼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는 무슨 뜻일까요? 갈등 없이 모든 구성원이 동의할 때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순간일까요.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은 모든 조항에서 전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권은 다수가 허락해서 주어지는 권리가 아닙니다.
평등은 불평등과 갈등을 빚으며 발전합니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여성이 시민권을 갖게 되는 이 모든 과정들은 과거의 불평등에 도전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억압되었던 사람들이 자신도 ‘사람’임을 새로이 주장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면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만들어지면서, 우리는 몰랐던 차 별을 인식하고 평등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현재의 갈등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 내 원칙을 만들어가며,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미래를 바로 이 갈등 속에서 현재로 앞당겨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높아져야 한다’고 말하며 그저 손놓고 법 제정을 방치해왔습 다. 이 주장의 앞뒤 구절은 반대로 놓여야 합니다 – 인권의식이 높아지기 위해 서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차별금지법은 합의의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와 그 속의 한 명 한 명이 일상 속에서 인권과 평등을 성찰하고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 필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그 일상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놓여 있습니다.
차별은 한 가지의 이유로 발생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차별 또한 서로 연결되어있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은 한 사람이 중첩된 경험을 하며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청소년 성소수자가 교사에게 아웃팅 협박을 당하는 상황은 성소수자이면서 청소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차별은 단 하나의 이유로 설명 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난민인 장애인, 고령의 여성노동자 등 우리는 여러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개별 사유에 따른 차별 경험의 합으로만 차별을 바라보거나 여러 사유 중 하나를 선택하여 차별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각자가 겪게 되는 고유한 차별 경험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차별이 발생하는 맥락을 여러 요인과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차별이 어떤 경험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합차별’을 다룰 수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존재합니다. 연령이나 성에 따른 고용차별을 금지하거나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노동조건에 차별을 겪지 않도록 규정하는 개별법들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개별법들은 특정한 차별사유를 구체화하여 심화시켰지만, 개별법만으로는 차별이 설명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닙니다.
가령 장애여성노인이 직장에서 차별당했을 때 고용상 연령차별금지를 다룬 연령차별금지법과 장애를 이유로 하여 장애인을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 고용상 성차별금지법의 기로에 서서 내가 겪은 차별이 어디에 속하는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각자 다른 차별시정기구 에 진정해야 한다면 너무 힘겹지 않을까요? 복합적인 차별 사유 중 효과적으 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구제받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러한 차별이 발생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차별의 경험을 포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차별의 경험을 보다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는 어려우니 논란이 되는 조항은 일단 빼고 가면 어떻겠는가”라는 주장을 하는 분과 만날 수 있습니다. 2007년 법무부가 차별금지사유 중 ‘성적지향, 학력 및 병력, 출신국 가, 언어, 범죄전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을 삭제했을 때도 비슷한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법상 차별금지사유는 예시조항이므로 일일이 다 적지 않아도 좋다. ‘~등에 의한 차별’로 다 포괄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해외의 차별금지법을 보면 차별금지사유의 예시조항이 조금씩 다릅 니다. 세계인권선언도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혹은 기타의 의견, 국민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이들과 유사한 그 어떤 이유에 의해서도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9개의 차별금지사유만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러 면 차별금지사유를 일일이 다 적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권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누리는 권리이므로 그 본질상 차별금지를 따로 천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국제인권규범은 세 계인권선언 이후 차별금지사유를 점점 더 많이 밝히고 있습니다. 차별금지사 유를 밝히는 것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깨달아온 차별의 경험을 공유하는 의미 가 있습니다. 차별금지사유에서 이미 존재했던 특정 항목을 삭제하자는 것은, 그 해당사유와 관련된 차별은 계속되어도 좋다는 의미가 되는 셈입니다.
차별하지 않아야 할 자와 차별해도 되는 자를 나누어버린 차별금지법은 이미 차별금지법이 아니라 차별을 조장하는 법입니다.
평등에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평등이 아닙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차별행위에 대한 조사와 구제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직권조사도 할 수 있고, 긴급구제 조치를 권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첫째, 전문적인 차별시정기구가 필요합니다.
국가인권위 진정접수 현황을 보면, 2001년 53건이던 차별행위 진정이 2010년 2,681건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권침해 진정에 비 해 적은 수로, 2015년 전체 진정 건 수 중 차별행위 진정은 20.4%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차별행위가 인권침해보다 적게 발생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이 적은 이유는 누군가 부당한 차별을 당해도, 그것을 ‘차별행위’로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하더라도 어떻게 구제절차를 이용할 수 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차별행위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이해의 장을 넓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권리구제절차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차별시정기구를 두어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홍보와 교육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시정기구의 역할을 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차별행위와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을 총괄하는 직제와 구성을 독립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차별행위를 더욱 폭넓게 다뤄야 합니다.
2001년부터 2015년까지 차별행위 진정 전체 건 수 중 10%도 안 되는 진 정만 인용 처리됩니다. 대부분 기각되거나 각하되는 것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조직의 구성과 절차 등을 다루는 법입니다. 차별행위를 판단할 때 어떤 점을 살펴야 하는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등 실체적 내용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국가인권위법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동주택의 층간소음에 관한 포스터가 어린이와 여성만 소음의 원인인 것처럼 만들어졌다면 차별적 광고일 것입니다. 그런데 포스터로 인한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으면 국가인권위의 조사대상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인권 의 관점에서 신중하게 접근하되 풍부하게 차별행위를 판단할 수 있도록 근거 법령과 전문적 기구가 필요합니다.
셋째, 차별을 예방하고 시정하기 위해 다양한 권한이 필요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권고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권고들을 꽤 해 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권고 대상 기관이나 법인이 무시하기 일쑤라 차별 이 존속됩니다. 대선 출구조사원 모집 대상을 ‘대학 여자 재(휴)학생’으로 한정 한 것이 성별 및 학력을 이유로 한 고용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진정이 있었습니다. 인권위의 결론이 ‘학력을 이유로 한 고용 차별’이었는데, 성차별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고용노동청으로부터 성차별 시정명령을 받은 회사 가 이미 ‘여자’ 부분은 삭제했던 것입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 기간제법, 파견 법, 연령차별금지법 등은 시정명령 권한을 갖추고 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역시 다양한 권한과 기능을 가져서 적절한 방식으로 차별에 대응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더욱 평등한 사회로 변화하기를 약속하는 것 이니까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2007년 제정된 후 10년 동안 국가인권위에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 진정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까요? 그보다는 차별을 당했을 때 그냥 서럽고 억울한 경험으로 넘기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 아닐까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는 것만으로 우리가 당해야 했던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별을 당했을 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생기는 것으로 우리의 삶 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주택 임대를 거부당하거나, 면접과정에서 정치적 의견을 밝히도록 강요당할 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리한 채용 조건을 감수해야 하거나, 머리모양을 이유로 아르바이트를 못하게 될 때, 이와 같은 차별 경험 은 공적인 문제가 되지 못하고 사적인 경험으로 남기 일쑤였습니다. 서로의 처 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함께 분노하고 위로해주었지만 사회는 여전히 ‘남의 일’로 여겼습니다. 차별 경험을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회는 차별의 부당 함보다는 ‘네가 당할 만한 일’로 여기며 귀찮아하고, 차별의 피해자 역시 자신 의 탓으로 여기면서 넘기려고 애쓰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문제제기 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고, 설령 목소리를 내더라도 사회는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렇게 차별은 견고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차별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절차나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 위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입니다. 차별 경험을 누군가 겪게 된 불 행한 일로 치부하지 않고, 아직 우리 사회가 평등하지 못함을 발견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합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마치 자신의 지위가 위협당하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차별을 집단 대 집단의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에 만들어집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남성이 여성을,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이 문제라고요. 그래서 차별금지법은 소수자를 배려하기 위한 법 이고 누군가의 양보를 요구하는 법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차별은 집단 대 집단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차별 진정 중에는 남성들의 진정도 있습니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간호사 채용을 거부당한 사례도 있는데, 성별 역할분담이 고정되면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불리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유치원에서 외국인 영어 강사를 모 집하는데 ‘Only White’라는 조건을 단 채용 광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백인이 흑인을 차별한 것이 아닙니다. 인종차별은 피부색이나 출신국가, 민족의 차이를 구분하면서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문제 입니다. 차별은 역사적이고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차별이 존속하는 한 우리 모두는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히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차별금지법이 필요합니다.
권리는 파이가 아닙니다. 누군가 권리를 누리게 된다고 내가 뭔가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학생이 교육받을 권리를 누린다고 해서 비장애학생 의 교육권이 침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헌법이 명시한 교육권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기본적 인권으로 확립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인권을 인권이게 하는 과정이지요. 누군가 겪는 차별이 정당화될 때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차별도 정당화됩니다. 그것은 언제든 우리 자신을 향할 수 있습니다.
소수자는 한 사회가 그/녀들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에 형성됩니다. 그래서 소수자들이 차별 경험을 더욱 많이 얘기하게 되는데,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결국 평등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우리 모두가 존엄한 인간으로 동료 시민이 되어가기 위한 소중한 계기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우리 모두를 위한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마음대로 말도 못하게 된다며 불안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 대하기도 하지요. 사실 차별금지법만으로 모든 혐오 표현을 규제할 수도 처벌 할 수도 없습니다. 혐오의 내용을 담은 표현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파급력이나 수위, 형태의 경중에 따라 어떻게 대응할지 판단이 필요하지요. 여러 국가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혐오선동이나 차별행위에 대한 일률적인 처벌보다는 ‘차별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한 교육과 더 많은 안내 등이 실질적으로 차별을 줄여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처벌 위주의 접근보다는 차별에 대한 의 식과 감각을 키우고 확장할 수 있도록 풍부한 대처 방안이 필요할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혐오선동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국가의 의지를 선언하는 계기는 될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의 자유를 위한 행동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권리이자, 누군가에게 이야기 가 들릴 권리입니다. 국제인권규범은 차별과 혐오를 선동하는 발언이나 표현을 표현의 자유로 보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현이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지요.
혐오표현의 금지는 자유 대 평등의 문제이기보다 자유 대 자유의 문제입니다. 한국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것과 이슬람교 신자임을 밝히는 것은 같은 무게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교리라는 이름으로 동성애 가 죄악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하는데, 누군가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것조차 두려워해야 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특권일 뿐입니다.
국가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면서 혐오와 차별을 없애가겠다는 의지를 밝힌다면 우리의 대항표현도 훨씬 당당하고 자유롭겠지요.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정체성을 포함하여 자신의 의견과 사상을 말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혐오표현에 맞서는 데에 대항표현(counterspeech)이 중요합니다. 차별의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 악의적인 편견, 부당한 주장 등에 맞설 때 혐오표현도 무력화될 수 있습니다.
2007년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냈을 때부터 줄기차게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던 세력이 있습니다. 당시 경총(한국경영자총연합회)을 비롯한 재계와 보 수 개신교 단체들은 학력, 성적지향 등의 차별금지사유를 문제삼으며 반대했고 결국 이 법안은 국회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됩니다. 그 후로도 18대, 19대 국회에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이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제정이 좌절됩니다. 이 과정에서 보수 개신교 단체들은 차별금지법이 ‘성소수자 차별 금지법’이라고 호도해왔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에 대한 설교 만 해도 목사가 벌금을 내게 된다, 한국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해진다, 청소년 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HIV/AIDS가 확산되어 세금이 낭비될 것이다 등의 근거 없는 주장을 유포하는 것이지요.
이들이 합리적 토론의 영역에는 발 들이기 어려운 편견과 왜곡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소수자를 가장 쉽고 편리한 혐오 대상으로 삼아 자신들 의 권력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정치적 네트워크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득권을 지키려고 특정한 집단을 타자화하고 자신들의 명분을 만드는 행태 는 전세계적인 ‘혐오의 정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성이나 이주민 등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 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과 정책에도 반대합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속속 밝혀졌듯이, 일부 극우 단체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전방위적 활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마저 이들의 혐오 대상이 되었던 현실을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혐오가 방치될 때,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든 모든 사람의 존엄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혐오선동세력에 우리가 함께 맞서야 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헌법의 평등이념을 실현하는 인권기본법이자, 포괄적인 차별금지를 실현하는 실체법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실천하는 연대체입 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함께 하려는 여러분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하 차제연)는 2011년 1월 출범하여 여러 활동을 벌였지만 입법 추진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지나는 동안 혐 오선동세력은 점차 기승을 부리며 활개치는 반면 인권과 민주주의의 씨앗은 숨을 유지하는 것만도 힘겨웠으니까요. 그러나 평등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으 며 광장에서 촛불로 함께 만났고, 민주주의는 혐오와 함께 갈 수 없으므로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더욱 본격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2017년 3월 23일 재출범하면서 차제연은 현재까지 138개 시민사회단체(2020. 7.)가 함께 하며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소속단체들이 모두 모여 운동의 전반적인 방향과 계획 을 토론하는 전체회의가 한두달에 한 번 꼴로 열리고, 그외 캠페인, 간담회 등 의 활동이 팀별로 이루어지며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점검됩니다. 가입 문의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차제연 소속단체로 함께 하시길 원하면 이메일로 문의 주 세요. 가입신청양식을 포함한 안내 메일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