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예감]’을’들의 이어말하기 (1)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 한종선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첫번째 이어말하기 | 숨겨지는 사람들의 커밍아웃


 


차별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정체성, 일하는 조건, 나이, 장애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안보이는 곳에 치우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에 맞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명은 숨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세 번째 이야기손님 


잃어버린 시간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 (『살아남은 아이』저자)


 



 


 



안녕하세요, 저는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인권유린 사건) 으로 알려진 그 형제복지원에서 1984년 에 입소하여 형제복지원 폐쇄되던 당일까지 살았던 한종선 이라고 합니다.




저는 제가 살아오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먼저 저희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희 가정은 아버지와 1남2녀의 어머니가 안계신 가정이었습니다. 저는 1976년 에 경북의성에서 태어났었고. 부산에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기전  9세의나이로 저는 부산 (봉례국민학교) 2학년에 다녔으며. 누나들 역시 저와 같은 학교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쉽게도 어머니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당시) 부산은행 근처에서 구두를 닦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당연시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무슨일을 추진했었는지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알수있는 일들은 없었습니다. 고작 9세의 나이의 꼬맹이 였을 뿐이니까요. 당시에 부산에 거지가 많다는 이유로 거리 부랑자 처리를 위해 부랑자(?)들을 시설에 가두게 됩니다. 아버지는 저와 누나를 파출소에 데려간후 잠시만 있으라며 파출소를 나가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출소 앞에 형제복지원차가 도착해 저와 누나를 형제복지원 차에 태우고 지옥같은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어떠한곳인지 말하기전에 형제복지원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같히 말하는게 맞을것 같아 같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형제복지원은 형제복지원 원장인 박인근 씨가 말하는것을 인용하자면 설립취지가 거리에 떠도는 부랑자들을 거두고 선도함으로써 종교를 통해 갱생의 길을 열어주고 다시 사람답게 살수있도록 도와주는 본인의 전재산을 털어 설립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형제복지원에 대해 이야기 할까 합니다. 형제복지원은 부산 주례동에 위치한 도심에 있었습니다. 주례동에 살았던 인근 주민들 조차도 형제복지원이라는곳에 대한 자세한 것은 모르고 그저 국가차원에서 진행한 사회복지 사업 일종의 하나로만 보았을뿐 부랑자들만 수용된 곳인줄로만 알고 있을 정도 였지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형제복지원은 말그대로 지옥이었다고 표현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표현 하면 제3자 입장에서 잘 이해가 안되신다는것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표현력이 짧다 보니 어떤말로 형제복지원을 표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겪은 형제복지원은 지옥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9세의 나이에 그리고 12세의 누나와 1984년 어느밤에 형제복지원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3년여를 살면서 제가 보고 들었던거 당했던 일들을 이자리서 모든것을 다 이야기 드릴순 없지만 간략하게 몇가지만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구타는 기본이고 기합과 고문, 성폭행 동성간에 성폭행과 강제노역 등은 매일매일 이뤄졌으며, 그로인해 12년간 형제복지원 자체기록만으로 사망자 수가 513명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은 사망자들 시체는 부산인근병원으로 시체 해부용으로 일부 300-500만원씩에 팔려 나갔습니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인원은 대략 3500 여명 이었으며,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소 였습니다. 당시 1980년도경 정부에서 지원받은 예산이 년간 20여억원 이었습니다. 사람수대로 예산이 책정이 되고 편성되던 시기였다 보니 시설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부예산을 받을수 있는 금액은 커져만 갔습니다. 




여러분들은 티브이에서 북한 에 대한 뉴스를 많이 보셨을겁니다. 무슨 행사때마다 온 국민이 나와서 방송 카매라를 향해 만국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해맑게 웃는 모습등과 군대가 각잡아서 행진하는 모습들을 많이 뉴스를 통해 보셨을 겁니다. 실상은 온국민이 지금 당장 먹지도 못해 영향실조에 걸리고 굶어 죽어가는것을 잘 알고 있지요? 제대로 먹지를 못해 화단 정리 하며 돌아다니는 지네도 산체로 먹어도 보았고  솔방울을 따서 껍질을 이빨로 갉아 내어 안에 있는 것을 먹었고. 새로 자라나는 세순 솔잎을 따서 먹고 황토와 같은 진흙덩이를 햇볕에 말려 과자처럼 먹기도 하였지요. 당시 형제복지원 에서 살았던 대부분원생들은 99퍼센트 정도가 영향실조에 허덕였으며. 앙상하게 뼈만 남은체 하루하루 기합과 고문 구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밤에는 동성간에 성폭행을 당하며 살아왔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형제복지원을 지옥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곳에서는 정상적인 사람들은 결코 살아남을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버리고 짐승과 동물이 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개와 돼지보다 못한 짐승이 되어야만 했고.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아마 형제복지원 에서 사셨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당시 아동소대에 있었거나 나이가 30대 미만이었던 사람들만이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의 충격으로 인해 지금도 정신병원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장애를 갖게 된  아버지와 누나 역시 다시 정신병원에 잡혀가지 않으셨다면 아마 아버지와 누나 역시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후 사회로 돈 한푼없이 쫒겨났던 형제복지원 다른 분들처럼 아마 부산 어느 길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차가운 땅에 묻혀 버렸겠지요…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후 1987년 부산거리에서 동사가 되었거나 굶어 죽은 사람들의 통계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부산 한지역에서만 부랑자들이 3500여명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시나요? 당시 내무부 훈령 410호에 의해 전국적으로 부랑자들을 대대적으로 시설에 가두게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은 그런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가둘수 있었고, 엄청난 예산을 정부로 부터 받아 낼수가 있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 잡혀오신분 대부분이 전국에 주소지를 두신분들이었습니다. 부산에 놀러 왔다가 주민등록증이 없어 잡혀 오신분, 밤늦게 술에 취해 거리에서 쓰러져 잠드신분. 반항기에 청소년들이 집을 나와 거리에서 잡혀 갔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게 되었지만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에게 훈장까지 두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욱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형제복지원에서 생활하는동안 젊고 이쁜 여자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나이 어린 아동들이 수백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매년 20여억원씩을 형제복지원에 주면서 형제복지원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감시 감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1987년 부산형제복지원 인권유린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형제복지원은 급히 폐쇄를 시키고 그안에 수용되어 있던 수많은 이들을 귀가 조치 하였습니다. 돈한푼없이 사회로 나온 그들은 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 끝에 거리에서 죽어갔습니다. 진상규명조차 없었고, 국정조사 역시 흐지부지 추진되다 말았습니다. 남은것은 형제복지원인권유린 사건에 관한 재판 만이 남았었으나 그 재판 역시 몇년을 끌어온 재판은 징역형 조차 2년 6월로 추징금도 없이 끝이나게 됩니다. 인권유린에 관한 첫단추인 불법감금이 무죄가 되었고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은 조사조차 재대로 되지 않은체 묻혀버리게 된것입니다. 당시 1987년 은 사건사고들로 대한민국이 한참 시끄러울때 였단것을 온국민은 기억 하고 있을것입니다. 1987년 하면 여러분들은 무엇이 떠오르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화운동 의 최고정점이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시는 분들도 있을것이고. 박종철 군 이 취조실에서 고문에 의한 사망사건 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많을것입니다. 그로 인해 민주화 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발화점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사건은 박종철 군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순간 묻혀갔고. 사람들의 기억속에 멀어질때쯤 재판 역시 축소은폐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사건에 대해 지금 조금이라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그때 그사건에 징역 2년 6월밖에 안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끝으로 제가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에대한 느낌을 간략하게 이야기 할까 합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민주화운동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당한 고통은 누구에게도 사실을 말할수 없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누구도 잘못을 인정않는, 누구도 사과 하지 않는, 그냥 당연히 너희들은 그런곳에 갇혀도 된다는 차별의시선 들이 저를 많이 힘들게 하였습니다. 부랑자라는 정의는 누가 정한 것이고 누가 행하는 것인가요?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서류 한장의 눈속임에 어마어마한 세금이 쓰여지고 사람들이 납치되다 싶이 끌려가고 죽어 나갔는데. 아무도 이런 사실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그러려니 모른 척 하고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요? 더 이상 우리를 차별 하지 말고 국민 한사람으로써 보아 주시고 지금 부터라도 진상규명을 해서 바로 잡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형제복지원 은 이름만 바꾸었을 뿐 지금도 그들의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악의 뿌리를 제거 하지 않으면 그 악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아실것입니다.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으로 얼마전 대한민국 이 떠들썩 했던 적 기억 하실것입니다.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역시 연루되어있고 지금 이 현실에도 형제복지원은 건재하고 그들의 재산은 엄청나게 부를 축적하여 지금도 떵떵거리며 부산에서 사회복지계의 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하루하루 겨우겨우 노가다라도 뛰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아버지와 누나처럼 지금 현제까지도 시설이나 정신병원에 평생을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대한민국 맞나요? 당시 부산지검 지검장이었던 이는 국회의장을 지내고 형제복지원 사건 대법원 판사는 대한민국 총리를 하겠다고 나오고, 부랑자들을 시설에 가두라고 지시 했던 이는 29만원 밖에 없다며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 한복판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 드리는 부분은 당시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과 편견들에 의한 차별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많은 국민들이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아무리 부랑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가가 하는 일인데 설마? 하면서  암묵적으로 동조 하였기에 가능 했었던 일이라고 봅니다. 이곳에서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촉박한관계로 형제복지원에 대한 사실 을 담은 책들은 몇 권이 있습니다. 김영욱 작가님의 <생과사의 낮과밤>김용원 변호사(당시의 형제복지원 수사담당검사)님 의 <브레이크없는 벤츠>와  제가 2012년 5월부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만난 한예종 전규찬교수님을 만나 제가 기억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기억을 담은 전규찬 교수님과 박래군 인권운동가 선생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읽어 봐 주시고 어려운 내용에 책이라 회피만 하지 말아 주세요.. 피하고 모른척 하고 난 다 알아 했던 문제가 지금 현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 주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을 동정하기 앞서 먼저 대책을 새워주시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위로와 동정은 그 후에 해주셔도 된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 합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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