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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법대로 살고 싶다고요 ② 지극히 우리 모두의 이야기
강위 (언니네트워크 편집팀) 우리가 얼마나 차별에 무감한 세상에 살고 있느냐는 지난 3월 31일, 군형법 92조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헙 판결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명실공히 ‘한 국가 내에서 최고의 실정법 규범인 헌법’에 대한 분쟁을 해결하는 헌재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차별 상황’을 인정하는 판결문을 공개했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군대 안에서 ‘닭 취급’을 받으며 차별 받아도 된다는 사회에 사는 것은 참으로 끔찍하고, 수치스럽고,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합헌 판결문 전문 보기) 이런 식이라면 너는 여자니까, 장애인이니까, 뚱뚱하니까, 어리니까, 외국인이니까, 가난하니까, 학력이 낮으니까 차별 받아도 된다는 말할 거냐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싶다. 실제 우리 사회는 이런 이유로 함부로 차별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이 ‘부끄러운 줄’은 알게 됐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권력층은 동성애에 대해서만은 ‘막 대해도 된다’는 막 되먹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답답하고 막막한 이런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며 차별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이들이 존재한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배포, 이것이 2011년 가장 ‘핫’한 운동을 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http://ad-act.net/)를 주목하는 이유다. 차별을 차별이라 부르지 못하고 … 무엇을 차별이라 할 것인가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에 따른 차별만이 아니라, 살면서 우리는 ‘차별을 차별이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세상이 정해 놓은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이 마치 ‘내 잘못’인 것처럼 뒤집어쓰게 되는 순간들. 무엇을 차별이라고 부를 것이냐에 따라 차별에 대한 항의도, 시정도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차별에 대한 정의는 상당히 중요하다. 이에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폭력적 상황 속에서 ‘무엇을 차별이라고 칭할 것인가’에 대한 열린 논의를 해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자, 여기서 오른손을 살포시 왼쪽 가슴 위에 (굳이 올릴 필요는 없겠지만 아픈 기억을 쓰다듬자는 의미에서 슬며시 한 번) 올리고서 ‘살면서 차별받은 순간’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는 면접관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애 낳고도 일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이성 애인이 없다는 이유로 직장 동료들의 대화에서 배제되었던 순간을, 결혼을 하지 않아서 전세 자금을 대출받지 못한 상황을, 이성애자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세재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 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박탈당하거나 옷차림이 유별나다는 이유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도, 내가 태어난 곳이 대한민국 서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과거에 앓았거나 현재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오해 때문에 불이익을 겪었던 순간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처럼 우리가 겪어온 차별 상황들을 드러내고, 그것이 왜 차별이며, 왜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초석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차별에 대한 인식을 바꿔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입장이다. 저기요, 제가 지금 차별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사실 차별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가해지기도 하지만,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방식으로 자행되기도 한다. 가령 결혼 여부나 성정체성에 대한 (무식이 철철 넘치는) 비하 발언을 듣고 심적 고통을 느꼈을 때,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을 때, 이것을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경우 가해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실질적(!)으로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며 오히려 ‘참 예민하게 구네’라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개인의 문제이며, 누군가 너무 예민해서 발생하는 균열일까.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이런 식의 차별은 ‘사회적으로 소수자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공동의 경험일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겪는 차별 상황에 대해 “이런 것도 차별이다”라고 계속적으로 발화함으로써 우리가 겪고 있는 차별을 드러내보자는 한다. 이렇게 말하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것이 개인의 문제나 심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금지되어야 할 차별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별 받았다’라고 느끼는 인식 주체가 중심에 선다는 점이다. ‘그게 무슨 차별이냐’ ‘나는 차별 한 적이 없다’라는 반응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차별이라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실상을 밝혀 가자는 말이다. 권고가 아닌 법이 필요한 이유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실체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가 실질적으로 적용된 적이 없다는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심지어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인권위의 권고도 무시당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실체법으로 작동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다. 이에 대해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는 차별의 구제를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한 권리구제와 법원을 통한 권리구제를 제시하고 있다. 심정적으로(?) 차별을 인정하고 애석해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차별 금지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장애인차별금지법, 연령차별금지법 등이 존재하지만, 이보다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 중에는, 차별 상황에서 복합 차별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 A라는 단일 차별을 받기보다는, A와 B, 혹은 A와 B와 C와 D의 차별을 동시에 겪고 있는 만큼 (아, 너무 아프고 슬프지만 현실은 그러하다), 실질적으로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더더욱 절실해진다. 한편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는 처벌이나 시정도 중요하지만,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데도 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차별을 받은 ‘개인’에 대한 차별구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차별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감수성을 높여 가기 위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등의 차별시정 의무’ 조항이 필요하단다. 정부기관에서 차별금지법에 반하는 기존의 법령, 조례, 규칙, 제도 및 정책을 조사․연구하여 이 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시정하면서 차별의 찌든 때를 벗겨내자는 것이다.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자, 엽기발랄변태적으로! 거대하고, 무겁고, 복잡한 얘기를 하는 이들이 엄숙하고 장엄하고 비장한가 하면, 네버, 노노! 우리 사회의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 이들은 엽기발랄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가장 크게 웃고, 가장 즐겁게 움직인다. 고정된 방식의 싸움이 아니라 가장 변태적으로, 고인 물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 균열을 내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죽도록 변하지 않는 것 같고, 이렇게 낙관해도 될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 때면, 지난 1월 LGBT 인권포럼에서 인상 깊게 접한 한채윤 KSCRC 대표의 발언을 떠올려 본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론(차별금지법 제정)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싸워 갈 테니.” 또한 2011년 언니네트워크 회원 워크숍에서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은 비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아시아 여성 연대 등에 관심을 가지며 활동해 온 이 공간(언니네와 언니네트워크)의 사람들이 가장 가슴 뛰게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던 언니네트워크 활동가 몽의 또랑또랑한 음성을 되새기게 된다. 그래, 차별과 억압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여성주의자라면, 뜻을 함께하는 당신이라면, 멀고 멀게 느껴지는 이 길에 진득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함께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당신,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서명을 받고 있다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마음을, 손을, 후원을 더해 주시라.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이 또렷하게 명시되어 있는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모든 차별을 금지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서, 어이없는 차별 상황에서 “법대로 해”라고 호기롭게 외칠 수 있기를. 더불어 법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넘어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이 터져 나오기를. 그리하야 더는 차별금지법이 필요 없을 그런 날을 꿈꾸며, 우리의 경험들과 언어로 단단하게 다져진 그 길을 함께, 즐겁게, 춤추듯 걸을 수 있기를, 속절없이 뜨겁게 기대해 본다.
차별 받아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동성을 사랑하는 군인은 군대 내에서 성추행/성행위를 할 경우(강제적인 행위가 아니더라도!) 1년 이하의 징역을 받는 것이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우리 사회는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성적지향, 성정체성의 문제를 주목하는 것은, 이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우리 사회의 차별 인식 수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앞서 말한 것처럼, 차별이라고 하면 물리적 폭력, 경제적 손실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소수자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왜 말하지 못하냐고? 드러내는 순간 혐오와 차별이 쏟아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누군지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은 그 자체로 명백한 차별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은 자신이 누군지를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말해지기 어렵고, 사회적으로 차별로 인식되기 힘들어진다.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없고, 내가 겪는 차별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차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상황. 이를 두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데, 나의 고통이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는데도? 동성애에 대한 혐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차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위 자연의 섭리,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동성애가 세상을 말아먹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지만, 그들은 ‘두려워서’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차별을 통해 얻어지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더 크게 몸을 부풀려 타인(자신보다 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너희들이 존재하는 것은 알겠지만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살면서) 내 눈에 띄지만 말라는 우아한 호모포비아도 존재한다. 하지만 성적 지향의 문제는 다른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고, 숨기고 살아야 할 무언가도 아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헌법 10조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11조에 명백히 위배되는 판결을 내리는 헌법재판소와, 차별을 지속하고자 하는 권력층을 마주할 때, 이들과 맞서기 위해, 함부로 차별을 행하도록 하지 못하기 위해 우리가 손에 쥐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거듭 떠올리게 된다. <사진 출처> 1,2,3,5,6) 게티이미지 코리아 : http://www.gettyimage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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